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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나 고려에서도 왜구처럼 해적들이 존재했나요?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가장 심각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남북조 나누어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천황이 남쪽으로 밀려나 북조와 대립하면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남조의 주민들 일부가 해적 활동에 나선 것입니다.1350년(고려 충정왕 2년)부터 시작하여 공양왕때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공민왕 때는 동해, 서해, 남해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침입하였습니다. 공민왕 때 왜구가 침입한 횟수는 115회나 됩니다. 그리고 우왕 때는 무려 378회나 침입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 침입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근심이 왜구만한 것이 없다'라 할 정도입니다. 이에 조선 초에 왜구 근절을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왜인들을 적극적으로 귀화, 3포를 개항하여 교역하거나 토벌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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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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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독도와 관련된 역사학적 해석이 궁금합니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40호에 의해 무주지인 독도를 다케시마라 하여 오키도 소관으로 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은 그 사실을 믿고 싶겠지요.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이미 우리나라는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에 의해 울릉도을 군으로 승격하고 독도를 관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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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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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노아의 방주를 14년전인 2010년에 튀르키예 동부의 아라랏 산에 한 구조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구조물의 목재 표본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성서에 대홍수로 노아의 방주를 띄웠다고 돼 있는 것과 비슷한 시기인 4800년 전 것으로 밝혀졌다고 하네요.게다가 홍콩 출신 탐사대원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융윙충은 “100% 노아의 방주라는 것은 아니지만 99.9%는 맞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하니, 설득력이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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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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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중국이 전쟁을 한적이 있나요?
1969년 3월 2일부터 9월 11일 중국과 소련이 국경 분쟁으로 전쟁이 있었습니다. 두 나라는 국경인 아무르강과 지류인 우수리강 유력의 영유권을 놓고 대립하였습니다. 중소 양국 국겨 수비대원들간의 말다툼이 몸싸움으로 번졌으며, 중국 국경 수비대원들이 밀리자 중국군은 특수부대원을 동원해 봉술로 소련군을 제압했고, 소련군은 봉을 무기로 판단해 중국군을 총격으로 사살하면서 확전되었습니다. 2주간에 벌어진 양측의 교전으로 소련군의 공식 사망자는 59며으 중국군은 1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이로 인해 중소국경지대에는 소련군 65만명, 중국군 81명이 집결해 대치하였으며, 소련의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은 중국에 핵공격을 포함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지시했습니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핵방공호 건설을 지시하고 수도를 베이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극단으로 치닫던 긴장이 완화된 건 그해 9월 양측이 국경회담을 다시 열기로 합의하면서였습니다. 이후 오래동안 국경협상을 추진했고, 2005년에 이르러서야 '중러국경협정'이 비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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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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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장수왕의 아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나요?
고조다는 장수왕의 장남이며, 문자명왕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장수왕이 97살까지 너무 오래 살다보니 왕위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조다는 고추대가로 70살 살았으며, 아마도 장수왕의 재위 후반 실질적으로 국정 업무를 대행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수왕이 남하정책의 증거로 충주 고구려비에 태자 공(共)이 고추가 공(古鄒加 共)로 기록되었는데, 여기서 태자 공이 조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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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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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과 충렬공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충무공, 충렬공, 충장공, 충민공, 충익공 등 '충'자가 들어가는 시호는 무관에게 내린 대표적인 시호입니다. 충무공은 9명이 있습니다. 인지도 순으로 이순신, 김시민, 이준, 남이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충렬공은 고경명 등이 받았습니다. 그외 충장공으로 권율 장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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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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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 느낌표의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물음표는 라틴어 ‘quaestio’에서 유래했다는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찾다’ ‘물음’의 뜻을 가진 단어로, 처음에는 약어인 ‘Qo’를 문장 끝에 쓰다가 ‘?’으로 단순화됐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느낌표 또한 라틴어 감탄사 ‘io’(환호)가 변형됐다고 주장이 있습니다. 즉 기쁨이나 경이로움을 나타내는 "io"가 느낌표 형태로 발전한 것이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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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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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청나라사람들은 머리에 변발을 했나요?
청나라을 세운 만주족 등 유목 민족은 일반적으로 변발을 많이 합니다. 이들이 변발을 한 이유는 전쟁에서 효율성 때문입니다. 과거 전투는 두꺼운 옷 위에 쇠로 된 갑옷을 입고, 말을 타면서 투구까지 쓰고 격렬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 때 머리가 거추장스럽고,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게 열을 빨리 식히기 위해 머리를 밀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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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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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토지 면적에서 1결의 넓이는 얼마나 되나요?
조선시대에 토지 면적을 나타내는 1결은 생산량을 기준으로 보는 면적 단위입니다. 일반적으로 토지 1결은 300두를 생산되는 토지 면적을 말합니다. 즉 '결'은 절대 면적이 아니라 생산량에 따라 1결의 면적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1결의 면적은 달라집니다.1등전은 6등전보다 비옥하기 때문에 생산량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1결을 생산하는 1등전의 면적은 6등전에 비해 작게 규정합니다. 조선에서는 각 등전마다 그에 맞는 자를 다르게 사용합니다. 예를들어 1등전의 1척은 주척으로 4척 7푼 5링비니다. 반면 6등전은 9척 5촌 5푼입니다. 따라서 1등전은 2753평, 6등전은 11035평 정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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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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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중에 "견물생심"은 무슨 뜻인가요?
'견물생심(見物生心)'은 물건을 보면 그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견물생심의 마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이며, 생기는 증상입니다. 누구나 좋은 물건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그것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다해 자기 소유물로 되다면 긍정적인 견물생심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물건을 탐하는 욕심만 있고 어떤한 노력도 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물건을 탐낸다면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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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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