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제사문화의 차이를알고시퍼여?
동양에서 제사는 유교와 불교를 기반으로 합니다. 조상이 지속적 존재로 살아 숨쉬며 후손을 지켜보는데, 제사를 통해 영혼을 초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효도와 가족의 연속성을 가지는 의미입니다. 서양은 로마 시대 조상 숭배에 있었으나 기독교가 확산된 후 영혼 숭배가 금지되면서 오늘날은 묘지 방문과 기도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5.0 (1)
응원하기
제야의 종의 유래에 대한 답글 바랍니다.
'제야의 종'은 중국 송나라 선총 사찰에서 108번뇌를 씻기 위해 섣달 그믐에 108번의 타종을 했던 풍습이 13세기 일본에 전파되었으며, 다시 일제강점기 1927년 일본 JOKA 방송국이 칸에이지 사찰 타종을 방송하며 '제야의종'으로 대중화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인 1953년 보신각에서 재개되었습니다. 33번은 제석천에 닿아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의미입니다. 새해에 33번뇌를 씻고 33천의 복을 비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보신각 종은 1468년 세조 13년 주조되었는데, 1985년 국민 성금으로 새로 주조되어 현재 사용되고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유럽의 역사는 언제부터 거슬러 올라가나여?! 답글 바랍니다만…
유럽의 역사는 기원전 2500년 경 에게 문명으로부터 기원합니다.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지중해의 에게 지역의 크레타, 트로이, 미케네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크레타 섬은 지중해 동안의 페니키아의 인접하여 오린트 지역의 문명을 전달받아 해양 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에게 문명을 바탕으로 그리스 본토에서 그리스 문명의 발전 기반이 되었습니다. 비록 문자 기록으로 유럽사의 시작은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서사시부터 본격적이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에게 문명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단종 이야기 자주 보여서 물어보는데요
1453년 새벽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이미 단종으로부터 군국 중대사 결정권을 위임받은 상태였습니다. 즉 병권을 이미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사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단종은 금군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세조 측 무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게다가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하고 지역 병마사들도 세조 친위 세력이었습니다. 즉, 고명대신 살해로 단종의 실질 지지 기반은 붕괴되었으며, 수양대군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 왕이라도 정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5.0 (1)
응원하기
구석기시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물도 있나요?
우리나라에서 구석기 시대의 시작은 약 70만년부터로 추정합니다. 그 근거는 단양의 금굴에서 별견된 유물의 연대 측정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70만년전부터 약 1만년전에 한반도 지역의 여러 곳에 구석기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됩니다.대표적 유적지로는 공주 석장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 단양 금굴, 청원 만수리 유적, 제천 수양개 유적 등이 있습니다. 특히 연천군 전곡리는 한탄강변의 대표적 구석기 유적이며, 아시아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대표적 구석기 유물로는 주먹도끼, 찍개, 자르개, 밀개, 슴베찌르개 등 뗀석기가 발견됩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고려 시대 정치와 사회 변화의 특징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고려시대는 정치적으로 태조 왕건이 호족 연합을 바탕으로 건국하여 광종 때 과거제, 노비안검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 갔습니다. 하지만 중기에 문벌 귀족이 성장하면서 왕권과 신흥 관료에 충돌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모순이 심화되고 차별 받던 무신들이 1170년 무신정변을 일으켜 100년동안 무신정권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몽골의 침입 이후 원 간섭기에 권문세족이 성장하여 각종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과정에서 신흥 무인이 성장하고, 신진사대부들이 결탁하면서 고려가 쇠퇴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려는 초기 호족, 중기 문벌 귀족, 그리고 무신정변 이후 무신이 지배했으며, 이후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들로 변경되어 갔습니다. 고려만의 특징이라만 불교를 숭상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례로는 팔관회, 연등회를 중시하고, 승과 실시, 국사와 왕사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번영은 종파 분열과 부패를 동반하여 불교 통합운동과 개혁 운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고려말까지 부패의 핵심이었으며, 이는 신진사대부들의 개혁 대상이 되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실존인물에서 따왔다던데 사실인지요?
홍길동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주인공입니다. 홍길동은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한 도적입니다. 그는 1500년 실록 기록에 의하면 '홍길동이 첨지중추부사라 자처하며 떼를 이끌고 관아를 드나들었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학게에서는 허균이 도적 홍길동 전설을 듣고 서얼 차별 비판을 주제로 소설로 창작한 것으로 봅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을 때 영토는 어느 정도였나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을 당시에는 졸본 일대의 소국이었습니다.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은 현재 지린성 환인현 지안시 부근의 졸본성(오녀산성)은 협소하고 고지대였습니다. 졸본성은 천연 지형을 활용한 방어 요새로 유용하였으나 영토 확장과 경제적 근거지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영토는 반경 수 키로 정도의 인구 수천명 정도의 소국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조선시대 왕들은 조금도 안걸어다녔나요?
조선시대 왕들은 대부분 가마나 여를 타고 이동했지만 반드시 걸어다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실록에 의하면 궁궐에서 왕은 여를 타고 이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협문은 낮고 좁아 가마가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적접 걸어서 통과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마나 여를 타지 않는 것은 권위 존중을 위해 공식 석상에서 불가능하였지만 산책과 같은 경우에는 국왕의 의지에 따랐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조선시대 한옥의 협문 높이가 낮은이유
조선시대 협문이 낮게 설계된 것은 우선 침입 방지를 위한 보안 이유 때문입니다. 낮은 문은 말을 타거나 무장을 하고 드나들수 없게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외부의 위협을 줄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또한 유교적 예절 문화의 영향입니다. 들어올 때 고개를 숙여 자연스럽게 공손함을 보여주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즉, 양반 가옥에서 하인, 소님이 주인을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도록 한 것이죠. 그 외에도 조선 시대 사람들은 현대인들에 비해 키가 작은 것도 영향이 이었을 것입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