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회의에 신라왕이 참석하지않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권이 강화되면서 국왕은 6부 대표자의 하나였던 존재를 초월하게 됨에 따라 지난 날 왕이 수행했던 화백회의 의장이 필요했는데, 그 것이 법흥왕 18년 설치한 상대등이라는 관직입니다. 상대등의 기능은 귀족회의인 화백회의 주재자로 국왕권의 상승을 의미하며, 귀족과 왕 사이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으나 점차 귀족을 대표하는 지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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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시기부터 신라하대로 분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는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면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대는 37대 선덕왕(780)~56대 경순왕(935년), 20대 약 160년간입니다. 이 시기는 무열왕계 왕실이 끊어지고 내물왕계 진골 왕실이 성립된 시기입니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부의 분열,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해상세력이 등장하고, 후삼국이 등장으로 신라가 약해집니다.그런데, 하대는 사실 대부분의 왕이 원성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차지합니다. 원성왕(김경신)은 내물왕의 12세손으로 김양상(선덕왕)과 함께 혜공왕 때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고 선덕왕을 즉위시키고, 김주원과 왕위 쟁탈전에 승리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자손들이 왕위를 독식했기때문에 원성왕계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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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묘호는 왜 열조에서 변경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조는 1649년(효종 원년)에 열조(烈祖)의 묘호를 받았으나, 8일 뒤 인조(仁祖)로 개정되었습니다. 열조는 열등하다는 의미보다는 굳셈, 강렬함, 공덕이 많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묘호이만 효종은 아버지를 위해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성리학의 최고 덕목인 인조로 하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묘호를 바꿀 당시 논란이 있었는데 '열' 자가 남당 서지고의 묘호라 하여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따르자 촉한의 유비도 사용한 묘호라 하여 고치지 말 것을 청했습니다. 심대부는 조(祖)와 종(宗)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선왕인 세조와 선조의 묘호도 옳지 않다고 주장했고, 유계는 인종의 묘호와 겹치니 협의를 분별하는 뜻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에도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효종은 듣지 않고 묘호를 인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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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2차 고려 침입 때 활약했던 양규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규는 거란의 2차 침입(1010) 당시 흥화진 성주로 거란군의 공격을 격퇴하였습니다. 이후 거란군이 통주에서 강조의 주력부타를 격파하고 또다시 양규에게 투항을 권했으나 거부하였습다. 오히려 양규는 흥화진의 7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통주를 공격하여 강조의 부하 1000여명의 구출하고, 이후 곽주성을 탈환하여 거란군 6000명을 베고, 성안의 7000여명을 구출했습니다.1011년 거란이 개경을 함락하였지만 끝까지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급하게 강화를 맺은 이유도 후방의 양규 부대가 두렵기때문입니다. 이후에도 거란군과 계속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양규는 1019년 공신녹권이 내려지고,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에 추봉되고 공신각에 도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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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는 외래어인가요, 고유어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마를 순우리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원래는 고구마를 뜻하는 ‘효자마(孝子麻)’의 일본어 발음인 ‘코오코마’가 어원입니다. 처음에는 ‘고코마’나 ‘고쿠마’정도로 불려지다가 ‘고구마’로 굳어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그리고 일본에서도 고구마는 류우큐우(오키나와현)가 산지로 일본에서는 처음 ‘카라이모(唐芋)’라 했습니다. 이러한 호칭으로부터 유추하건대, 고구마는 중국 남부지역(원산지는 멕시코로 17세기 초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한다)에서 재배되던 것을 류우큐우 상인들이 가져와 전래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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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은 고종이 체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효력이 있다고 본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을사늑약은 국제적으로 기준에 맞지 않는 조약입니다. 즉 당시 주권자인 고종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으며, 외부대신 직인을 탈취해서 날인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고종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열강의 지지 하에 외부를 폐지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을사늑약을 효력을 발휘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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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도 잡아먹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도 호랑이 고기는 고급 요리로 인식되었습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1917년 12월 도쿄의 국제 호텔에서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루로의 초대를 받아 모인 200여명의 소님들에게 함경도 호랑이, 영흥 기러기, 부산 도미, 고원 멧돼지 등을 접대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도 호랑이 고기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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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항쟁 중 외친 호헌철폐는 무슨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87년 직선제 개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은 부천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등 독재 정권의 모습을 은폐하려는데 급급합니다. 게다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현행 헌법(간선제)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권을 이양한다는 선언을 하게 되는데, 이를 4.13 호헌조치라 합니다.4.13 호헌 조치가 발표와 함께 박종철군 고문 치사가 폭로되자 민주헌법쟁취운동본부는 6.10국민대회를 추진하게 됩니다. 이때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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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중 타산지석의 유래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돌'로 해석됩니다. 타산지석은 <시경> 소아편 학명(鶴鳴)에 나오는 5언시의 한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돌을 소인배에 비유하고 옥을 군자에 비유하여 군자도 소인에 의해 수양과 학덕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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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이 처음 사용했던 말이 다 일재 잔재라고 봐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토불이'이란 원래 불교 용어로, 신(身)이란 지금까지의 행위의 결과인 정보(正報)를 의미하고, 토(土)는 신이 입각하고 있는 환경인 의보(依報)를 의미하는데,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토불이라는 용어는 1907년(메이지 시대) 육군약제감 이시즈카 사겐을 회장으로 출범한 식양회가 식사로 건강을 기를 수 있다는 독자적 이론을 전개했고, 향토음식과 제철음식이 좋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양회 이사였던 육군기병대좌 니시바타 마나부가 그 생각을 표현하는 표어로 “신토불이”를 제창했습니다. 쇼와 시대에 들어 “신토불이는 불교에 기초한 일본의 전통”이라는 설이 유기농업・자연식판매업・생협운동・일부 농업단체・대체의학 등 제분야로 확산되었습니다그런데, 일본에서 유래된 용어라도 부정적인 인식으로 일재잔재라고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 것이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면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전파, 변화, 발전합니다. 오늘날도 같은 양상입니다. 청자가 중국에서 와서 더욱 발전하여 상감청자가 되었고, 가요가 서양에서 들어와 K-pop이 되었으며 한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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