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건축물 건설 시에 동원되는 노동자에 어떤 보상이 주어졌나요?
고대 시대 대규모 건축물 축조시 노동자들은 월급보다는 식량, 숙식, 의복, 또는 토지나 지위로 보상받았습니다. 노동 보상은 '살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주었던 것입니다.메소포타미아 같은 지역은 곡물이나 빵같은 배급이 임금의 기본이었고, 일부는 토지 이용권이나 생산물 배분으로 보상받은 것입니다. 이집트는 음식을 조리하여 대량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특히 피라미드 노동자들은 빵과 맥주, 상황에 따라 소, 염소, 양고기를 제공받았습니다. 즉, 피라미드나 신전 건설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왕권과 종교 권위를 드러내는 국가 사업이었기 때문에, 많은 인력을 오래 유지하려면 안정적인 급식 체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다만 자발적 임금 노동자는 아니었으며,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 즉 부역의 일종으로 동원된 형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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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전쟁은 왜 두 왕가 사이의 오랜 내전으로 이어졌나요?
장미전쟁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30년간 영국 내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내전입니다. 왕위 계승권이 애매한 상태에서 왕위 계승권을 놓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가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라 주장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백년 전쟁 이후 귀족 무장 세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들이 왕위 계승 분쟁에 쉽게 개입할 수 있는 환경에서 벌어졌습니다. 한번 전투로 끝나지 않고 유력 가문들이 번갈아 우세를 점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전쟁이 이어졌습니다.즉, 장미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된 이유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분명하지 않았고, 약한 국왕과 강한 귀족 세력이 맞물리면서 분쟁을 끝낼 강한 조정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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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당시 총알도 반으로 갈랐다는 전설적인 명검 다마스쿠스 강의 제조비법은 왜 현대에 전수되지 못한건가요?
"총알도 반으로 갈랐다"고 할정도 상당한 전설화되었지만 그만큼 강한 다마스쿠스 강은 중세 이슬람권에서 쓰인 고급 검용 강철입니다. 표면에 물결무늬가 나고 아주 예리하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매우 예리하여 얇은 천이 닳아도 잘 베어지며, 강도가 강해 무뎌지지도 않습니다.인도산 우츠강같은 고급 원료를 사용하는데, 제조 기법이 전수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원료 공급이 끊기고 제조 환경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쿠스 강을 만들기 위한 광석, 탄소원, 온도 조절, 장인의 경험이 함께 이어져 내려와야 하는데 그 조건이 무너진 것입니다. 따라서 전설적인 중세 명검이지만 오늘날 같에도 같은 형태도 완전히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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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바다에 침몰한 배에서 발견된 고대 그리스의 안티키테라 기계는 어떤 기계인가요?
1901년 그리스 안티키테라 섬 근처에서 침몰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기계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겉보기에는 작은 청동 상자 장치였는데, 내부에는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들어 있어 손으로 돌리면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해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태양, 달, 행성의 위치와 월식, 일식, 달의 위상, 달력 주기까지 예측하던 정교한 기어 장치였습니다. 손잡이를 돌리면 여러 기어가 연동해 천체의 주기와 달력 정보를 계산한느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제작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 후반에서 1세기 초로 추정합니다. 즉, 2000년전 사람들이 매우 수준 높은 천문, 기계 공학을 바탕으로 제작된 고대 그리스 아날로그 시계, 또는 컴퓨터와 같은 기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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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저장보다 재구성의 과정에 가까울까요?
인간의 기억 능력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기는 어렵습니다. 저장된 내용은 그때그때 재구성하는 과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기억을 회상할 때 뇌는 과거의 흔적만 읽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재구성합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감정 상태가 무엇을 더 강조해 기억할지 바꾸고, 빠진 부분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채웁니다. 신경과학적으로 기억을 떠올릴 때 기존 기억이 잠시 불안정해지고, 그 과정에서 다시 저장되는 재고정화 단계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기억은 꺼낼 때마다 조금식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왜곡, 거짓 기억, 목격자 마다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즉, 기억은 저장이라기보다 해석과 재구성에 더가깝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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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은 어떻게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나요?
수나라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612년 침략시기에는 정규군 113만명 가량이 침략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저항에 국경 부근에서 진격하지 못하자 우중문에게 30만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이 30만대군을 물리친 것입니다.그가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요인은 을지문덕 장군이 소모전을 통해 수나라군의 체력과 사기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보급을 차단하고, 청야 전술을 통해 식량과 보급을 고갈시켰습니다. 또한 거짓 항복과 같은 방식을 통해 수나라 지휘부를 흔들었으며,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지형을 활용하여 역습하여 물리친 것입니다.수나라군은 규모는 컸지만 깊숙이 침공한 장거리 원정군이라 보급과 지휘가 약했습니다. 반면 고구려는 지형을 잘 활용하여 끊임없이 수나라군을 괴롭혔습니다. 결국 살수에서 최후의 일격을 가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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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원래 이름이 류관순인가요?
원래는 유관순 열사는 고흥 류씨로 한자로 柳寬順이라서 류씨로 표기합니다. 다만 지금은 유관순이 더 널리 불리기도 합니다. 한글 표기에서 두음법칙 때문에 류씨성을 '유'로 적는 관습이 퍼졌는데, 유관순이라는 표기도 두음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본래 류씨성도 두음법칙에 따라서 '유'로 표기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본래 성씨 표기를 인정해 '류'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씨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기때문입니다. 즉 혈통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두음법칙을 일방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버들류씨면 원래의 발음대로 류를 써도 되고, 관습적으로 유를 써온 사람은 그대로 써도 되는 것입니다. 즉, 성씨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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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길이는 대화의 의미를 바꿀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답변자 생각으로는 침묵의 길이도 대화의 의미를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의사소통 중에 침묵은 단순히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동의, 반대로 거절, 그리고 숙고, 긴장, 배려 등을 표현하는 방식이라 생각합니다.예를 들어 짧은 침묵은 생각을 정리하여 전달하기 위한 시간이라 봅니다. 반면 침묵이 길어지면 망설이거나 불편함 심경을 전달하는 의사입니다.그리고 맥락에 따라 침묵은 긴 침묵은 편안함, 사색을 전달하는 방식이고, 토론에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즉, 대화 중에서 침묵은 오히려 몇마디 말보다 정확하기 상대방에게 심경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전달되는 의사 소통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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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나요?
고구려의 수도는 졸본, 그리고 국내성, 마지막에는 평양성으로 하였습니다. 평양 천도는 427년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겼습니다.평양 천도는 단순히 수도 이전이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국내성은 방어에는 유리하나 땅이 좁고, 북쪽에 치우쳐 있어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면 평양은 대동강 유역으로 평야가 발달하여 경제 기반이 강했으며, 교통에도 유리했습니다. 특히 남진정책에 유리한 지역이었습니다.또한 국내성에 오랫동안 뿌리 내린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평양 천도는 고구려가 만주 중심의 방어형 국가에서 한반도까지 아우르려는 공격적, 확장형 국가의 변모이며, 남진 정책을 위해서입니다. 또한 국내성의 재지 귀족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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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하영이 신규드라마 홍보차 예능에 나와서 자기 가족 내력을 말하면서 소환된 증조부 안상호가 일제 시대에 친일 행적 논란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운데 구체적 친일 내역이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입장을 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 대정친목회 평의원, 겨엉부협의회원, 겅성 종로 금융조합 조합장 등 친일 행보를 보였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에서는 안상호의 친일 행적에 대해 맞다고 하였으나 친일 인명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것은 선정 기준의 미달로 보류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한 상태입니다. 즉,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것이 곧 친일이 아니라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 통치 구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정황이 확인되 인물이라 공식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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