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무역 중심지는 벽란도와 개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외의 지역에서는 거래 자체가 없었나요?
물론 벽란도는 개경과 연결되는 항구로 대외 무역의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개경도 관청, 귀족, 상인이 모인 도시라 물자가 집결하고 내부 유통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벽란도와 개경 이외에도 지방애는 주현의 향시, 그리고 교통과 수로가 만나는 지방 교역 거점이 존재했습니다. 특히 국경 지대와 교통의 요지에는 지역 생산물을 교류와 변방 교역을 담당했습니다. 예를 들어 서경(평양), 남경(한성), 동래 같은 곳은 거점 지역으로 역할을 했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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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고구려 문화유산이 발굴된 적이 있나요?
삼국시대 5세기에는 한강 이남까지 고구려 영토였던 시기가 있어 고구려 유물이 꽤 많이 발견됩니다. 남한에서 가장 유명한 고구려 유물로는 1979년에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입니다. 남한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비석으로 고구려가 한강 이남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근거가 됩니다. 비문을 통해 고구려의 관직명과 신라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94년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류가 확인되는 등 여러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한강 유역을 지키던 군사 전초기지로 서울, 구리 일대에서 여러 확인됩니다. 산 능선을 따라 배치되었으며, 성벽, 건물터, 온돌, 저수시설 등 고구려 군대의 주둔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토기, 석실묘, 관방 시설 관련 유물도 함께 조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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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은 왜 여러 중동 국가로 그렇게 빠르게 확산됐나요?
'아랍의 봄'은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중동과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진 반정부 시위, 혁명의 물결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랍의 봄이 이렇게 삽시간에 퍼진것은 우선 많은 아랍 국가의 정권들이 장기 집권, 부패 등으로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를 주도한 청년들은 실업과 미래 불안이 컸는데, 관료 부패와 인맥을 통한 성공이라는 불합리한 인식이 분노가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쇼셜미디어를 통한 인터넷 연결망으로 다른 나라로 확산되었습니다.즉, 아랍의 봄은 아랍의 여러나라가 비슷한 억압과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고, 쇼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퍼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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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춤과 인디언이랑 상관관계가 있는지
"토인"이란 북미 원주민을 단순하게 부르는 표현으로 이들이 추는 춤을 토인춤으로 부른 것 같습니다. 토인춤은 정식 문화 명칭이라기 보다는 서구에서 영화나 공연, 만화 같은데서 원주민을 묘사할 때 북치고, 원을 돌며 외치는 장면을 흔히 넣었고, 이런 이미지가 굳어 '토인춤'이라 한 것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민 원주민마다 춤의 형식과 의미가 달라 하나의 춤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프라카 피그미족의 행사와 직접적인 역사적 연관성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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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 기간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한 건가요?
복날은 누가 만들었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중국에서 24절기와 음행오행과 간지인 60갑자 체계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초복은 하지가 지난뒤 세번째 경일, 중복은 하지가 지난뒤 네번째 경일, 말복은 입추가 지난뒤 첫번째 경일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하지와 입추는 24절기로 태양의 고도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절기이고, 경(庚)은 간지의 60갑자와 관련됩니다. 그리고 ‘복(伏)’은 더위에 기운이 눌려 엎드린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름의 강한 양기 속에서 음기가 아래로 숨어 있는 때라는 음양적 해석도 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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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는 어떻게 여러 나라로 나뉜 독일을 통일시켰나요?
나폴레옹 전쟁으로 독일에서는 신성로마 제국이 분열되었으나 민족주의 운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관세동맹으로 경제적 통일을 이룬 독일은 1848년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여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를 열어 통일 헌법과 자유주의적 통일 입헌국가를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뒤 통일의 주도권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에 넘어갔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적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철혈정책(군비 확충과 전쟁 승리)을 통해 통일을 이룰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1866년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문제를 일으켜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 결성하였습니다. 이후 남부 지역의 통일을 위해 1870년 보불전쟁을 일으켜 1871년 독일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던 것은 자유주의와 평화로운 방법도 중요하지만 군사력과 경제력을 충분히 갖추어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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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대 수명이 100세라는제 맞나요?
기대수명은 어떤 시점에 태어난 사람이 현재의 사망률이 계속된다면 예상되는 평균 수명입니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출생아 기대 수명이 80세 후반으로 100세까지 생존할 확률은 아직 이릅니다. 현대 의학은 암, 심장질환, 감염병 같은 것으로 인한 사망율을 줄였지만 노화 자체를 줄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화를 막는 것은 세포 노화, 면역, 유전자 손사으 대사 이상, 암 발생 같은 복잡한 전반을 동시 해결해야 가까워지는 길이라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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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상은 왜 절대왕정 시대에 등장해서 그 체제를 비판했나요?
좋은 질문이네요. 계몽 사상은 18세기 과학혁명과 합리주의 철학 등의 영향을 받아 국가와 제도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위기가 퍼졌습니다. 즉, 국가와 사회의 불합리한 제도도 이성에 의해 바꿀 수 있으며, 진보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특히 절대왕은 왕이 법과 정치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계몽 사상가들은 이를 비합리적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볼테르는 관용과 표현의 자유, 루소는 사회계약설과 국민주권론, 몽테스키외는 권력 분립을 통해 왕권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성적인 군주, 좋은 군주가 계몽되어야 하기 때문에 백과전서가 유행했습니다. 즉, 계몽 사상은 불합리한 절대왕정에 대해 이성적으로 바꾸려는 비판 사상으로 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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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에 대해서 궁금한점 질문드립니다.
을지문덕은 612년 고구려에 침입한 수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역사적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개인 가계, 후손에 대한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후손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어 이어지는 가문을 확정하기가 힘듭니다. 다만 일부 전승에 의하면 목천 돈씨가 을지문덕의 후예라고 전합니다.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전쟁, 이주, 족보 소실 등으로 가문의 계보가 중단되거나 고구려 처럼 멸망한 나라의 가문은 다른 성씨로 바꾸어 후손을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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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국어에서 성조가 생겨난 이유가 뭔가요?
중세 국어에 성조가 있는 것은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어 내부의 음운 변화와 방언 차이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중세 국어는 소리 높이 체계로 단어 뜻을 구별하였습니다. 이런 체계는 오랜 시간 동안 음절 구조, 자음 소멸, 길이 차이 같이 변화가 누적되면서 생길 수 있습니다.근대 국어로 가면서 성조가 사라진 것은 쓰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말소리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즉 발음 구별 방식이 점점 달라져 다른 특징들로 재편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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