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서 서울 도심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봤나요?
전쟁은 인명은 물론 많은 것을 파괴합니다. 6.25전쟁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서울의 기반 시설인 주택, 학교, 공공 시설, 철도, 다리 등이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특히 한강 다리가 폭파는 서울 시민들의 대피를 어렵게 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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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침략이 없었다면 고려는 어떤 모습으로 발전을 했을까요?
고려의 침입이 없다면 고려는 외세의 압박 없이 보다 안정적 정치와 경제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고려는 거란의 공격 방어에 집중하면서 이는 내치에 소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침략이 없었다면 보다 안정적으로 내치에 집중할 것이며, 안정적으로 송과 교류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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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절개의 어원이 설마 로마제국에서 온게 맞나요?
제왕절개(Caesarean section)의 어원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왕절개로 태어났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라 합니다. 이 주장은 카이사르의 이름이 '제왕'을 의미하게 되면서 제왕절개라는 용어가 생겼다고 합니다. 즉, 카이사르의 이름이 제왕을 의미하는 'Caesar'와 연결되며, 영어 'Caesarean'의 기원이기도 합니다.그러나 또 다른 주장으로 제왕절개라는 용어는 라틴어 'caedere' (자르다)에서 유래했되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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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고려를 간섭한 기간은 얼마나 되나요?
원나라가 고려를 간섭하기 시작한 것은 1270년 개경 환도 이후 부터 1356년까지 86년간 지속되었습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 자주 정책을 통해 쌍성총관부를 완전히 수복한 시점입니다. 따라서 원의 간섭이 사실상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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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서 온 왕비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했나요?
원나로부터 온 왕비들에 의해 고려 왕실에도 몽골어가 대거 들어왔습니다. 이들 원나라 공주들과 결혼한 고려 국왕들도 몽골식 이름을 갖고 몽골 풍습을 따르고 아울러 몽골어를 구사하였습니다. 충선왕 같은 경우는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국제정치를 하면서 차기 황제를 옹립하기도 했으니 말할 것도 없고, 공민왕도 왕이 되기 전에는 대도에 가 원나라 황제의 숙위를 지냈으니 몽골어 정도는 자연스럽게 구사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왕실을 중심으로 구사된 몽골어는 민간에까지 확산되어 현재에까지 사용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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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하지못한 양반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나요?
양반은 주로 관직에 진출하여 국가로 부터 수조권을 부여받거나 녹봉을 통해 수입을 얻을 수 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관직에 진출하지 않아도 선대로 부터 상속받은 토지로 부터 수익을 얻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은 일반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주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양반층의 분화로 대다수 양반은 몰락하여 평민과 다름 없는 잔반으로 전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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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선거로 뽑은 나라는 어디인가요?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은 선출한 나라는 미국입니다. 미국은 1787년 필라델피아엣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이 헌법에 의해 1789년에 전국적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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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로마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로마는 3세기 이후 정치적으로 군인 황제가 출현하여 혼란하였으며, 게르만 족 등 이민족의 침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민병이 약화되고 용병에 의지해야 하니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으며, 노예 공급이 중단되어 부자유 소작농에 의지하는 자급자족적인 콜로나투스제가 확대되었습니다. 전염병과 기독교로 인한 문약해졌으며, 동서로마로 분열되면서 쇠퇴하였습니다. 결국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 서로마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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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왕국, 공화정,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데 이들 각각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로마는 왕정, 공화정, 제정으로 변화 발전하였습니다. 로마는 처음 왕정 체제였으나 510년 왕을 내쫒고 공화정을 수립하였습니다. 기원전 519년부터 시행된 공화정은 왕정적인 집정관 2명과 귀족정적인 원로원, 그리고 민주정적인 민회가 존재했습니다. 처음에는 공화정을 귀족들이 주도했으나 평민권이 신장하면서 평민회와 호민관이 설치되었습니다. 공화정은 집정관, 원로원, 민회에 권력이 분립하고 상호 견제가 중요하였습니다.그러나 기원전 21년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으면서 제정이 시행되었습니다. 제정은 황제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원로원의 권한은 제한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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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유럽의 통치자들을 보면 전쟁에 항상 먼저 앞에서서 지도하던데 우리나라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요?
우리나라에서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서 지휘한 국왕으로 대표적인 사례는 광개토대왕입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19대 국왕으로 전쟁에서 이끌어 영토로 확장시킨 국왕입니다. 그는 392년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석현성을 포함하여 여러 성을 직접 점령했습니다. 또한 400년 신라의 구원 요청에 따라 5만 대군을 이끌고 지원에 나서 왜군을 물리쳤으며, 유목민족인 후연의 수도를 공격하여 현재 베이징 근처까지 진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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