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는 실존인물인지 궁금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실존인물은 아닙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오디세이>의 주인공이며,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다만 트로이는 실제로 존재했던 에게해의 폴리스로 19세기 독일의 고고학자 슐레이만에 의해 유적이 발굴되어 실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트로이 전쟁과 이후 이야기로 그리스의 성장 초기 신화를 통해 역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트로이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큰 에게 문명의 폴리스이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과 충돌과 통합 과정을 신화로서 표현한 서사시입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당시 전쟁에 참여한 왕이지만 신화가 더씌워진 서사적 인물인 거으로 추정하나 입증할 증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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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누가 어느시대때 만들었나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여기에 질문 올립니다
옷은 특정인에 의해 발명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털이 없어 추위에 취약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죽, 나뭇잎, 풀 같은 재료로 두르기 시작한 것이 옷의 유래입니다. 아주 오래전 인류가 추위와 상처를 막고, 나중에는 꾸미기와 신분 표시를 위해 점차적으로 옷이 발달한 것입니다. 구석기 시대에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죽, 풀 등으로 가리는 용도였으나 신석기 시대에는 뼈바늘과 실을 이용하면서 직접 옷을 만들어서 입기 시작했습니다. 즉 옷의 처음 목적은 추위, 바람, 햇빛, 마찰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점차 장식, 신분, 의례, 멋을 위해 옷을 제작하여 입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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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가르쳐주세요
이모트콘은 처음에는 텍스트 이모트콘 사용에서 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즉 글자, 특수문자를 연속하거 의미를 부여하여 전달하는 형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ㅠㅠ", "ㅋㅋ", "^-^"와 같은 형태입니다. 1982년 미국 카네기멜렌더의 스콜 팰만이 온라인 게시판에 처음 텍스트 이모트콘을 제안하면서 알려졌다고 합니다. 이 것이 그림 이모지로 발전하면서 현재의 이모트콘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일본에서 휴대폰용 그림 이모지가 등장하였고, 1999년 NTT 도코모시 시케타카 쿠리타가가 초기 이미지 세트를 만들어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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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 태극기 거꾸로 단 건 우연일까요, 실수일까요, 의도일까요?
정치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합니다. 따라서 태극기 배지를 거꾸로 다는 행위는 분명히 국민들에게 실망을 줄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태극기를 거꾸로 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실수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공개적으로 확인된 사례들은 당사자가 '배지가 돌아갔다', '다른 의도는 없다'고 바로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반복적으로 보이는 경우는 당연히 의심할 수도 있지만 우연한 실수일 것으로 판단합니다. 또는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한 모습이므로 국민들에게 부정적 인식을 없애려고 정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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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사회주의는 왜 현대에도 왜자꾸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나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산업 혁명 이후 노동자 계층의 등장과 빈부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사상입니다. 즉 자본주의 성장으로 나타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대안이었습니다. 특히 20세기초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는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인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역할에는 실패하였으나 현재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는 분배, 정의, 복지 등의 문제의식에 대한 호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지적한 것처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이 반자본주의, 반미를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하지만 이상과 실제 행동 모습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빈부 격차 및 불평등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적 요소, 즉 평등, 분배, 복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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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은 왜 구식군인들의 봉기에서 시작해서 청나라 개입까지 이어졌나요?
1882년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구식 군인들은 오랫동안 급료를 받지 못했는데, 13개만에 받은 급료도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받자 격분하여 난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군란이 확산되어 민씨 세력과 일본 영사관 습격으로 확대되었고, 방패막으로 찾아간 흥선대원군은 군란을 이용해 재집권을 노렸습니다.난군은 경복궁을 공격하자 민비는 충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 군란 수습을 부탁하면서 흥선대원군의 뜻대로 재집권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충주로 피신한 민비가 청에 구원을 요청하자 청군이 들어왔으며, 일본군도 자신들의 피해를 이유로 제물포에 군함을 파견했습니다. 청은 일본군이 조선에 압력을 가하면서 조선과 청의 충돌할 것을 우려하여 모든 군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대원군을 텐진으로 압송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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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시대에서는 손톱이랑 발톱 같은 관리를어떻게햇을까여?
구석시 시대, 신석기 시대의 손발톱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손통이 길어지만 자연스럽게 부러지거나 마모되는 것을 방치했을 것이 일반적이라 봅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돌도끼, 돌칼 같은 것으로 다음에서 관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손톱을 이빨로 물어 뜯어 길이를 짧게 유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작은 칼이나 가위로 손톱과 발톱을 깎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강한 돌로 갈아서 매끈하게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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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왜 공화정을 택한이유가 뭔가요?
국권 수호 운동과 독립 운동 초기 독립 이후 근대국가의 모습을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주의를 지향하려는 움직임 있었ㅅ니다. 특히 3.1운동 이후 독립 운동의 중심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었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것은 일반 국민이었던 것입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 민족이 스스로 주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왕정복고는 상징을 쓸 오아실의 정치적 중심성이 약했고, 망명 정부가 실제로 국가를 세우려면 공화주의적 헌정질서가 더 적합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는 왕실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법통은 잇되 제도는 공화제로 간다고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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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직전 삼부회는 왜 무력화되어 있었나요?
프랑스 혁명 직전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5년만에 삼부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즉, 삼부회는 국왕의 자문과 세금 승인의 성격이 있었지만 정기 의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필요할 때 소집되었는데, 1614년이 이후 열리지 않은 것이 루이 16세때 소집된 것입니다.하지만 표결 문제를 놓고 1,2신분은 신분별 투표, 3신분은 머리수 투표를 원했습니다. 신분별로 1표씩 행사하는 방식에서는 성직자와 귀족이 서로 손잡으면 항상 제3신분이 밀렸기 때문에, 국왕 입장에서도 굳이 삼부회를 열어도 원하는 결정을 얻기 어렵고 정치적 갈등만 커질 수 있었습니다. 절대 왕정 시절 삼부회는 국가 운영의 중심 기구가 아니며, 거의 형식적인 협의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1789년 오랜만에 소집된 삼부회에서 갈등이 터진 것입니다. 즉 3신분이 머리수 투표를 요구하면서 혁명의 불씨가 된 것이죠. 국왕과 귀족들은 삼부회를 해산하려 했으나 3신분들은 테니스코트에 모여 국민의회를 열어 독자 행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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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외국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옛날에 외국 소식은 주로 사신, 상인, 포로, 그리고 외교 문서를 통해 알았습니다. 조선과 명청 사이에는 공식적인 외교 채널이 있어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국서를 교환하였습니다. 일본과도 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문서와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긴급한 것은 국경에서 봉수로 알리고, 파발로 문서를 빠르게 전달하였습니다. 고려도 역참이 있어 사신과 문서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는데, 거란, 송, 여진 같은 주변국과 사신 교환을 통해 소식을 전했습니다. 민간에서든 상인, 승려, 포로, 표류민 등을 통해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으며, 여러 경로로 소문과 해석이 섞여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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