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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꼭 귄해주고 싶은 책을 소개받고 싶네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책을 많이 읽으시네요.저도 2개의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요.책은 홍수처럼 쏟아져나옵니다.그런데 어떤 책을 선택해서 읽을 것인지는 고민이 많이 되죠.밀리처럼 전자책을 읽을 수 있는 앱도 많이 제공되고 있네요.최신 서적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서점에서 제공되는 자료를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무엇보다 책은 혼자 읽으면, 독자의 상황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도 있으니,함께 읽는 사람이 있고 같이 읽은 내용을 토론할 수 있다면 참 좋겠죠.독서모임은 많이 있으니 밴드를 통해 가입하고 함께 읽고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사이먼 시넥의 "Start with WHY" 어떨까요?기업 컨설팅 요소가 강하지만, 개인의 자기개발에도 도움이 될 것 같네요."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p. 67 WHY는 일의 목적이나 대의, 신념이다. 이를테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이다. 회사는 왜 존재하는가? 내가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왜 이런 질문에 관심을 가져야하는가?조직이나 개인은 대부분 생각하거나 행동하고 의사를 전달할 때 골든서클의 가장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즉 WHAT에서 출발해 WHY로 간다. 그럴 만도 하다. 가장 명확한 것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하는지 자주 말하고 가끔은 '어떻게' 하는 지도 말하지만, 이 일을 '왜' 하는 지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하지만 뛰어난 회사와 리더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모든 일의 시작점이 골든서클 안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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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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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 로마신화 등 신화는 왜 만들어졌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존재의 이유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4대원소를 주창하기도 하고, 5대원소라기도 하고^^그리스 신화는 주로 세상은 왜 이런 상태로 존재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주로 바다가 생겨난 이유, 동물들이 다양한 형태로 생겨난 이유, 사람이 어떻게 생겨나 현재의 삶의 방식을 가지게 되었는 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신화이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과학이었다고 해야겠죠.그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려 했는데, 생명의 근원, 어둠의 존재, 사랑, 존재가치를 설명하려고 그 근본적인 개념을 의인화하여 신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원래 '신'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전쟁 영웅'이 존재할 뿐이었지요.그러나 로마가 이탈리아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그리스문화에 동화됩니다.언어와 통치기반, 법과 제도, 의사결정을 모두 그리스 방식에 따르게 되지요.그러다 보니, 그리스신화를 받아들입니다.로마신화라는 것은 초기 로마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로마제국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이미 암살당해 고인이 된 가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의 양자,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가 로마의 집정관이 되어 양아버지를 신격화 하여 'Divus Caesar'라 칭합니다.옥타비아누스는 황제를 거절했는데, 양아버지가 이 문제로 살해 당했기때문입니다.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래 이름인 ‘옥타비아누스 시저’ 대신 ‘존엄한 사람, 신성한 사람, 축복 받은 사람’이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시저’라는 이름을 선물합니다.양아버지를 이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2번째 신이 되었으며, 살아있는 최초의 신이 된 것입니다.그리스문화인 헬레니즘은 로마보다 앞서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대왕을 통해 지금의 중동,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까지 퍼져나갔습니다.알렉산더대왕은 헬리니즘 전파를 위해 정복전쟁을 벌였고, 정복지에 그리스어와 그리스철학, 그리스문명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이렇게 알렉산더대왕의 정복과 연이은 로마의 정복으로 그리스문명은 세계화되었죠.그러나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후 천년의 중세시기에 그리스 신화는 금지되었습니다.고대 그리스 신화가 어떻게 지금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 정리가 되었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원본은 현재 그리스 로마 신화로 한 권의 책으로 편집되어 있지 않고그리스문학 속에 언급된 것들을 참조하여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해야겠죠.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헤시오도스의 '신통기', '노동과 나날'호메로스 찬가, 서정시들그리스 비극 문학작품 속의 내용들,헬레니즘 시들로마제국 저술가들의 글고전학자들이 발견한 자료들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헬레니즘과 로마제국의 영향은 서구유럽의 문화, 예술,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제는 서구 문명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식민지들도 언어와 사상, 문학에 그리스 신화의 영향이 남아있죠.시인과 예술가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받은 영감으로 작품을 남겼고, 우리나라 역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 신화의 영향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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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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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에서 책을 왜 읽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자유를 누리고 살아갑니다.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디에 사용하느냐는 자유죠.그러나 인간만은 유독 자유를 속박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 합니다.마치 무엇을 하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 같고, 소속감을 잃거나, 소외될 것 같은 생각을 하기때문이겠죠.책도 마찬가지 아닐까요?책을 읽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그러니 책을 읽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 같이 느껴지죠.책은 작가의 삶이나 저작 의도가 들어있습니다.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 내가 죽을 때까지 접해 볼 수 없는 경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이 있죠. 책 이외의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기때문에 책을 읽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종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해봅니다.영화, 드라마, 게임, 웹검색, SNS에서 책을 읽듯이 반복하거나, 연관 검색을 한다면 모를까,책이 제공하는 종합적인 정보와 정보량,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정도가 조금은 다르죠.책이 이차원적(문자만으로 쓰여진, 가끔은 삽화도 등장하지만)이기때문에, 문자를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적이 있는 이미지들로 상상을 하게 됩니다. 영상세대가 아닌 라디오세대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3차원의 정보들, 시각과 청각과 공간을 직접 제공하는 영화, 드라마, 게임을 통해 입력된 정보는 자신의 것이 될 확률이 낮습니다. 물론 책을 읽을 때에도 전혀 상상력이나 공감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얀 종이와 검은 글씨만 보고 넘어간다면 책도 마찬가지이겠지만요.책을 읽으면서, 상상력이 끝없이 제공되고, 감정이입이나 공감을 통해 감정이 개입된다면, 시각적 정보입력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정보들이 종합되죠.많은 연구들을 통해, 2080법칙이 생겨났는데요.자기 스스로 직접 말하거나 행동에 옮기지 않고, 듣거나 보거나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20%, 직접 자신의 입으로 말하거나, 만지거나, 만들거나,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한 후 답을 찾아본 경우는 80%가 기억됩니다.24시간 내에 다시 생각한 것은 80%, 24시간이 지난 기억은 20%만 남습니다.이렇게 본다면, 오늘 읽은 책을 내일 다시 꺼내 읽는 경우에는 64%가 기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오늘 영화, 드라마, 게임, SNS를 통해 접한 내용을 내일 다시 확인하지 않는 한, 4%만 기억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그러나 책은 3일째도 또 들고 읽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때문에, 영구히 기억되어 버립니다.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해야하는 이유와, 평소에 계속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기억을 잘 하는 이유이죠.누구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굳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그러나 다른 그 어떤 정보습득 방법보다 책을 선호할 자유도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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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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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왜 파르테논 신전을 만들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존하는 파르테논 신전은 이미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그 자리에 있었던 신전이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가 침공하여 파괴되었는데,페르시아를 물리친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도 델로스동맹을 결성하여 승리로 이끈 장군이자, 정치가, 웅변가였습니다.그는 여신 아세나(그리스어: Αθηνά, 전쟁의 신)가 아테네를 지켜준 것을 기리며 이 신전을 재건합니다.아테네는 예술과 문학이 장려되고, 덕분에 세계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명성을 얻게 되었죠.고대의 신전이 그렇듯이, 델로스동맹의 금고와 재무담당의 회합 장소로 사용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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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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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왜 배워야할까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는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고,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미 지나간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인류는 현재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으니까요.기록된 역사만 아니라,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도 유물로 어느 정도는 추정할 수 있죠.역사의 기록물은 현재 우리 인류의 삶을 다른 동물들처럼 살 수 없게 만들어 버렸죠.지금 아하컨텐츠를 사용하는 것도 아하플랫폼이 만들어진 역사가 있었기때문이죠.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삶은 인류에게 가장 실용적일까요?만약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이 가장 비실용적인 삶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면, 역사를 배워서 삶을 더 실용적으로 바꾸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실용적이다, 또는 경제적이다, 아니면 가치있는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요.역사 속에서, 또는 인류가 남겨놓은 기록물들 속에서, 우리는 후회하지 않을 삶을 미리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실용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가장 비실용적이었으며, 결국은 후회하는 인생이 되어버린다면, 참 억울하겠죠.기회비용 중에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질문자님이 아하에 이 질문을 남기신 시간은 기회비용을 사용하신 것이죠.다른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시거나, 누군가와 즐거운 만남을 가지거나, 어디론가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아하에 질문을 올린 시간은 실용적이었을까요?역사 속에 아하플랫폼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기회비용을 아하플랫폼에 질문을 올리는 데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아하플랫폼에 질문을 올리고, 저같은 사람은 이렇게 답변을 다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이라는 기회비용을 사용합니다.여러가지 개인적인 다양한 이유가 있어서 여기 시간을 사용하고 있겠죠?저는 나름대로, 조금이라도 질문을 올리시는 분들이 궁금증이 해소되고,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삶에서 가치있는 기회비용사용법을 얻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답변을 제공합니다.이것도 역사가 되죠. 인류가 남긴 백과사전과 도서관에 비치된 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아하플랫폼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잖아요?문자기록의 역사가 없었다면, 인류는 100년 이하를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문자를 창안하지 않았다면, 기술문명의 진보는 없었겠죠.역사는 어떻게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했는지, 집단생활을 하다보니 '질서'라는 개념을 받아들였고, 그 질서가 어떻게 강화되어서 전체주의, 또는 제국주의에 악용되었는지 알려줍니다.너무나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던 이성과 합리는 2차세계대전으로 설 자리를 잃었죠.그래서 현대사회는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록으로 남겼고, 현재 우리의 삶은 거의 대부분 탈중앙화로 내달리고 있습니다.과연 우리가 선택한 민주주의, 자유, 자본주의, 신자본주의, 이념체계는 실용적일까요?복지국가론은 시민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있을까요?국가권력은 시민에게서 나옵니다.시민의 투표권은 권력의 최상위에 자리잡고 있죠.그러나 역사는 국가권력이 어떻게 대중의 투표권을 조작하는 지 잘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지난 대통령선거 역시 아주 좋은 예를 남겼다고 할 수 있죠.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집단주의 성향을 가집니다. 통치하기 쉽기때문이죠.그러나 인류는 국가주의, 집단주의를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투쟁합니다.이렇게 역사는 현재진행형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 민족주의, 자국이익추구 등 세계화를 거부하는 나라를 보십시오. 그들은 세계화를 처음 부르짖었고, 세계화를 통해 가난한 나라들을 착취했던 나라들입니다.그런데 세계화는 노동인구의 이주를 불러왔죠.이주노동자는 1억2천명이 넘습니다.미국은 국경을 통제하기위해 콘크리트벽을 세웠습니다.우리나라 시민들은 입법기관인 국회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죠.도대체 시민들은 어떤 사회를 꿈 꾸고 있는 것일까요?코로나팬데믹은 전세계 시민들이 자유를 외치도록 만들었죠.이탈리아와 프랑스 시민들은 정부가 봉쇄하는 정책에 반감을 표하며 베란다 축제를 벌이기도 했습니다.시민들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죽고, 그 시신을 다 처리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1775년 영국군대를 피해 숨어서 열린 식민지의회 연설 중 마지막 말입니다.이 연설은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죠. 그는 제안설명의 마지막 한마디로 이 문장을 사용했습니다.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이 마지막 문장은 듣는 이들의 심장을 멎게 할 만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그는 직접 미국독립 전쟁에 참가하여 나중에는 버지니아 민병대 총사령관 겸 버지니아 주지사로 활약했습니다.마침내, 미국 독립이 이루어졌고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그에게 국무장관직을 맡아달라고 했지만,그는 한사코 사양하고 고향인 버지니아 주지사직을 네 번 연임하였습니다.역사가 아무 감동도 없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줄 가치를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역사를 모르면, 그저 어제 살았던 삶을 오늘도, 내일도 반복할 뿐입니다.이 말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라고 한 스페인 출신 미국철학자 조지 산타야의 말에서 배울 수 있죠.이 말은 유태인 학살의 장소, 아우슈비츠수용소 입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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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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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영향력이 곧 국력이다 라는 말에 어느정도 동의하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반도는 지리적 특성때문에 수백번의 전쟁이 일어난 곳입니다.몽골제국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일연은 삼국유사를 기록하여 대몽항쟁을 독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고려가 몽골제국인 원나라의 속국이 아니라고 표현하고 싶겠지만, 몽골의 군대는 한반도를 완전히 초토화시켰습니다. 무신정권과 왕은 강화도로 피했고, 한반도 전역은 몽골군의 초토화작전에 희생되었습니다.1233년 5월, 무신 정권에 대항하여, 경주와 영천의 농민군이 봉기하여 관군과의 전투를 벌여 서로 죽인 시체가 수십 리에 널려 있었다고 전합니다.1248년의 4차 몽골침공까지 아주 작은 나라 고려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고, 한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학살되었습니다.무신정권과 왕이 백성을 지켜주지 않았기때문에, 민심은 흉흉했습니다.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승려 일연은 한반도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모아 민족성을 고취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281년 고려 충열왕 시기에 인각사에서 집필되어 원판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시대의 2개의 간행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전설로 구전되는 문화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치시켜서,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게 되죠.1368년 중국 한족계 주원장이 반란을 일으켜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웠습니다.원나라는 전쟁에 능했지만, 몽골의 문화가 주류문화가 되지 못했습니다.결국 한족이 정권을 잡게 되는 과정 역시 한족 문화가 몽골 문화보다 주류문화였기때문이 아닐까요?이후 조선은 명나라를 추종하여 중국보다 더 유교사상으로 투철한 나라가 되었죠.서양에서 살펴보면, 알렉산더대왕은 헬라언어와 헬라문화를 전세계에 심겠다는 목표로 정복전쟁을 벌입니다.알렉산더가 정복한 지역에는 헬레니즘현상이 생겨났습니다.헬레니즘은 수학, 과학 기술의 전수와 문화, 경제간 상호 교류, 그리고 이민족들에 대한 포용정책으로 인류사에 최초로 등장한 세계시민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는 정복전쟁 중에 전사했기때문에, 더 이상의 정복전쟁은 멈추었지만, 그가 전수한 헬라문화는 이후 세계시민의 기본적 문화로 자리잡았죠.굳이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군사력보다는 문화의 힘이 더 강하다고 주장해 보려고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Edward Bulwer‐Lytton)의 1839년에 발표한 역사극 '리슐리외 또는 모략'(Richelieu; Or the Conspiracy)의 2막 2장에서 처음 말한,"True,—This!Beneath the rule of men entirely great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BeholdThe arch-enchanters wand!— itself a nothing!—But taking sorcery from the master-handTo paralyse the Cæsars—and to strikeThe loud earth breathless!—Take away the sword—States can be saved without it!"'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번역되죠.수사적인 표현으로, 주로 미디어의 역할을 강조할 때 많이 쓰이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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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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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주류문화의 차이점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중문화보다 하위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대척점이 분명할 것 같습니다.주류문화의 반대말은 하위문화가 되겠죠.대중문화는 주류문화와 하위문화가 범주가 섞여있을 수 있으니까요.대중문화와 주류문화는 대부분 공통적인 범주를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나 대중문화처럼 인식되지만, 하위문화로 범주가 구분되는 것이 있죠.하위문화는 주류문화가 인정하려 하지 않기때문에, 주류문화 측면에서는 하위문화는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문화라고 규정하려고 합니다.사회가 다변화되면서, 주류문화, 대중문화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모든 다변화된 사회 전반에 걸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누리는 민족문화에 반대하고, 소수의 삶의 방식을 문화라고 부르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하위문화가 다양하게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고, SNS와 유투브같은 인터넷기반의 기술발전이 낳은 효과라고 볼 수 있죠.하위문화는 일부만이 공유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요.시간대, 공간의 특성, 시대적 상황을 담아내기때문일 것입니다.세대간 격차,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의 시기, 주류문화에 대한 반감 등이 공유되고, 확산된 것이라고 하면 되겠죠.주류문화는 하위문화를 이해할 수 없기때문에, 부정하거나 억압할 가능성이 높구요. 하위문화는 주류문화의 억압을 오히려 노이즈마케팅하여, 하위문화의 커뮤니티를 강화시키게 됩니다.서로 충돌하고, 비판하거나, 더 나아가 비난하기도 하면서, 결국은 반문화(히피족?)의 경향을 보이게 되죠.미술에서의 하위문화의 예로 적당한 것은 그래피티(Graffit)일 것입니다.거리의 공공장소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법이며,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위문화로 발전하고, 예술로 승화되어, '낙서', '예술' 사이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대부분 인종차별, 에이즈 퇴치, 반전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때문에 주류문화를 비판하면서,시대와 공간의 특성을 살려 예술적 디자인을 통해 지역사회에 인정을 받게 되었죠.베를린 예술지구로 지정된 곳입니다.인류가 질서를 지키고, 이성적 판단을 한다고 믿고 있는 주류문화에게,하위문화는 결국 인류는 물론이고, 대자연과 지구, 더 나아가 우주 전체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쏟아내죠."가만히 있으라"는 침몰하는 선상의 스피커로 들려오는 소리에 대한 비난은 하위문화의 방향을 잘 표현합니다.다원화 사회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주류문화 속에서 자유와 해방을 선언한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커뮤니티를 만들어가고 있고, 소수문화가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하위문화가 대중문화로 발전하기도 하지 않을까요. 물론, 대중문화가 되고나면, 주류문화이지 하위문화로 인식되지는 않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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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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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에 대한 질문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슬람교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무함마드를 박해하는 종교였습니다.로마제국이 기독교국가가 된 후, 유대교와 에비온파, 네스토리우스교 등을 핍박했기때문에,아라비아반도와 메카는 유대인, 유사 기독교도들이 이주해 살던 곳입니다.AD 570년에 메카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잃고, 가난한 삼촌을 위해 대상으로 일했던 무함마드는정직하고 신실했으며, 능력도 뛰어나 재정후원자였던, 15살 연상의 과부 카디자와 결혼합니다.무역으로 부를 얻자, 명상을 통해 진리를 찾았습니다.히라산에서 천사를 만나고 혼이 빠져버린 남편을 위해 아내 카디자는 삼촌, 와리까 본 나우팔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유사 기독교인 에비온파였던 나우팔은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것이며, 예언자가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무함마드는 메카에 있는 카바신전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나, 신전에서 수입이 줄어들 것을 걱정한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AD 619년, 무함마드의 첫 제자로 무슬림 신자가 되었던 아내가 죽고, 어린 자신을 키워주었던 삼촌도 같은 해 사망합니다. 그래서 이주를 결정하고, AD622년 메디나에서 이슬람을 받아줄 것을 협약을 하고 이주합니다. 이것을 헤지라, 또는 히즈라(이주)라 불렀고, 이슬람교의 달력의 원년이 됩니다.모함마드는 말이 멈춘 곳, 수하일의 과수원 땅을 사서 최초의 사원과 자신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메카를 향해 정해진 5번의 시간에 절하며, "알라는 위대하시다"를 외쳤습니다.70여명의 이슬람 교도들이 대부분 그를 따라 메디나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들과 함께 아라비아를 통일할 생각으로 제정일치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그리고 AD 628년 고향 메카로 돌아가 평화조약을 맺었으며, 2년 뒤에는 630년, 1만명의 무슬림과 함께 메카에 무혈입성하고, "알라후 아크바르(알라신은 가장 위대하시다)"를 외치며, 메카의 다른 신상들을 모두 파괴하고,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원정을 통해 이슬람을 전하다가, 632년 열병으로 사망합니다.이후 칼리파를 선출하고, 이슬람국가들은 9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이룹니다.10세기 말에는 투르크족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주류 기독교였던 동로마제국 비잔틴과 전쟁을 치릅니다.비잔틴이 전쟁에 패하자, 서아시아는 이슬람화 되었습니다.서로마제국은 이 시기에 십자군전쟁을 시작했죠.무려 200여년간(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십자군원정이 계속되었습니다.이런 역사적 경험은 이슬람종교와 기독교종교 사이에 적대적 관계가 형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과격한 이슬람의 모습은 종교갈등이라고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이 후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에서 제외된 이슬람 지역은 과학이나 문화변혁을 겪지 않게 됩니다.1974년 키신저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페트로달러체제의 예를 보아도, 이슬람지역은 교육이나 문화, 군사현대화에 있어서 오랫동안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봐야겠죠.이렇게 변화하지 않은 제정일치사회는 현대화되지 못했기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억울한 경우를 많이 당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국화된 국가들로부터 피해을 입었기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야되겠죠.
학문 /
철학
2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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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술작품의 가치는 사기에서 시작됩니다.만약 미술작품을 아무도 사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겠죠.미술품을 산다는 것은 이미 그 작품을 감상했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대부분의 전시된 미술품은 이미 가격이 붙어있는 채로 전시관에 전시됩니다.그 작품을 감상하다가, 그 전시관에 산정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죠.그러나 가격을 상정할 수 없는 작품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팔려고 하지 않거나, 경매에 나왔을 경우, 살 사람이 많다면, 가격은 경매가로 정해지겠지요. 미술작품의 가치평가는 전문감정인에게 의뢰할 수 있습니다.미술품 시장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는 전문감정인은 특정한 작품에 대한 가치를 적정가로 평가할 수 있죠.이렇게 형성되어 있는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이력도 중요하겠죠.그리고 사회분위기도 큰 몫을 차지할 것입니다.그 시대의 상황을 잘 담아내고 가장 잘 표현한 미술작품을,그 시대의 대표적 화가가 그렸다면, 그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미술품 수집가는 큰 대가를 지불하려고 할 것이기때문입니다.반면에 아직 미술계에 이력이 없는 화가의 작품은 물감과 화구의 종류, 캔버스의 크기에 따라 적절한 가격이 형성되어 있습니다.그러나 NFT는 전혀 새로운 분야이기때문에,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이르죠.NFT시장이 어느 정도 평균치를 형성하게 되면, 여기에도 전문감정인이 등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세상의 모든 NFT들의 가격 책정 데이터를 조합하여 적정가를 산정하게 되겠죠.
학문 /
미술
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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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선 평생 동정이셨나요??
안녕하세요. 장상돈 경제·금융/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록에 의존한다면, 예수님이라는 분이 2천년 전 쯤에 33세나 34세의 나이에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네요.30세 정도의 나이부터 기록이 남아있기때문에,당시의 결혼적령기로 본다면, 이미 결혼을 했을 수 있는 나이이지만,30세 이전의 기록이 없으니, 결혼을 했는 지, 하지 않았는 지는 모르겠네요.그러나 기록된 3년 정도의 기간에 결혼을 할 만한 여유(?)는 없어 보이네요.다빈치코드는 예수라는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살았다고 하는 데,이것 역시 기록에는 없는 것이고요.다빈치코드라고 하는 말 자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작품, 마지막 만찬이라는 작품 속에 막달라마리아를 표현해 놓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기때문에, 다빈치의 명성을 이용한 소설가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한 것 같네요. 만약 다빈치코드로 막달라마리아를 그려넣었다면, 마지막 만찬에 요한이라는 사람이 빠져있어야하는데,다빈치가 그 당시 예술 작품에 요한을 뺀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어찌 되었건, 다빈치코드는 소설가 댄 브라운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이 되었습니다.카톨릭과 개신교 등의 반발이 오히려 노이즈마케팅이 되기도 했고요.질문자님이 '예수님이 동정이셨는지, 아니셨는지'라는 문구 자체가 댄 브라운의 의도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이런 표현이 충분히 노이즈마케팅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동정이었던, 아니었던,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죠.그런데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선정적인 표현을 통해 명예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여 나의 유익을 얻으려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글쓰기 방식이라고 여겨집니다.결혼을 하지 않았느냐와 동정이냐는 또 다른 표현이잖아요?질문자님의 질문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받게 될 지를 충분히 고려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예수라는 사람은 인류에게 참 사람이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중요한 가르침을 남긴 분이죠.그 분이 자신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한 것 같지도 않고요.댄 브라운은 예수라는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려고 소설을 쓴 것 같지는 않습니다.소설 다빈치코드는 생각해 보아야할 많은 관점을 제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예수라는 분에 대한 과도한 신성시하는 것이 어떤 역사적 결과를 낳았는지 숙고하게 만들죠.그러나 질문자님의 질문은 다빈치코드를 읽으시거나, 영화를 보시거나 하신 것 같지는 않고(질문만으로 보아서),'예수님께선 평생 동정이셨나요?'라는 제목으로 제가 이렇게 답변을 쓰게 만드셨네요.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지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예를 들면, "만약 프랑스로 막달라마리아가 망명하여 예수님의 아이를 낳고 길렀으며, 남편 예수와 함께 묻혔다면,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어떻게 보아야할까요?"라고 말이죠.
학문 /
역사
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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