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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겸 성악가 강경원입니다

지휘자겸 성악가 강경원입니다

강경원 전문가
부산진구남성합창단
Q.  고려시대에 귀주대첩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19년 2월 1일,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龜州)[7]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로 초기의 기선 제압은 물론, 유격전술, 청야전술, 망치와 모루 전술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승리한 전투이다
Q.  청나라의 용골대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용골대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심복으로 충성심이 깊은 한편, 때론 조선 사람들의 뒤를 봐주고 잇속을 챙기는 입체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우리나라에 이순신이 있다면 청에는 용골대가 있다고 해도 좋을만큼 용골대는 청의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연인에 등장하는 칸은 청의 태종 홍타이지라는 왕인데 용골대는 홍타이지 사후에도 청의 장수이자 정치가로 꽤 큰 역할을 했고 청이 하나의 국가로서 자리잡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병자호란등으로 전쟁의 상대국을 지휘한 장수였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좋았을리 없지만 자국의 승리를 위해 조선을 공격하고 왕족들의 승복을 받아내는 등의 지극히 당시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국을 위한 활동을 했을 뿐 실제 용골대 장군 자체가 잔악무도하고 무자비하게 조선을 대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속국에 가까운 지위를 조선에게 강요한 것에 비해, 실제 조선에 대한 처우는 꽤 예를 지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볼모로 잡혀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민회빈 강씨에 대해서도 왕족으로서의 대우를 깍듯이 했음은 물론 이후에도 조선의 관리들에게 사리에 맞지 않는 처우를 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하지는 않았던 것이 여러 기록으로 남아있기도 합니다출처: https://iwannaknoethat.tistory.com/119 [알고 싶은 것들이 많은 사람 1인:티스토리]
Q.  하공진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전기의 무신이자 목숨을 바쳐 현종과 멸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한 충신으로 진주 하씨 시랑공파(侍郞公派)의 시조이다.1010년(현종 1)에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당하였다. 그 해 요나라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고려에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요군의 철수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요성종을 만나 '현종은 이미 남쪽 수천리[2] 밖으로 피했으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요성종을 속여 거란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3]고영기와 함께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요성종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고려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연경(燕京)으로 옮겨져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평소 저자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두고 귀국을 꾀하다가 탄로가 나 요성종의 국문을 받게 되었다.요성종은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요성종을 크게 격분시킴으로써 살해된 뒤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하였다.문종이 후에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하였다
Q.  에펠탑이 건설중에 시민들이 반대시위를 벌인 배경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파리의 전경을 해친다고 생각했지요.사실 지금도 에펠 탑의 조명이 다 꺼진 새벽 3시 이후에 에펠 탑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평소엔 웅장하던 에펠 탑도 이 시간대에는 숨 막힐 듯 흉물적이고 압박적이라고 한다. 조명을 끈 저녁 에펠탑의 사진을 보면 어둠의 탑인 바랏두르가 실체화된 모습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형태이며 꼭대기 부분의 항공장애등이 붉게 켜져 있는 상황이라 더더욱 마왕의 눈을 떠올리게 한다.[11] 당대 건설 직후에는 지금처럼 화려한 조명장치가 없었고 해가 지기만 하면 저렇게 흉물로 변했으니 사람들의 평가가 부정적이었던 것도 이해가 가는 반응. 그럼에도 파리의 스카이라인이 낮은 편이라 도심 주변이라면 에펠 탑을 보기가 쉽다.이게 건설되기 시작하자 꼴도 보기 싫다며 정말로 파리를 떠난 예술가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대문호 기 드 모파상이었는데, 파리의 풍경을 해친다며 건설을 반대했으며, 얼마나 싫어했는지 에펠 탑이 안 보이는 방향으로 창을 낸 집에서 살 정도였고, 누군가 에펠 탑에 있는 음식점에서 자주 식사를 하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모파상 왈, "파리에서 에펠 탑이 안 보이는 장소는 이 곳 뿐일세."라고 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다만, 진위여부가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12] 이후 에펠 탑 근처의 몽소 공원에 세워진 모파상의 동상도 에펠 탑과 등을 돌린 방향으로 세워졌다.다만 모파상이 에펠 탑 음식점에서 매번 커피를 마셨는지는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귀스타브 에펠은 한동안 이 탑 3층 한 구석의 사무실에서 실제로 살았다. 이유는 상술한 대로 당대 예술가들이 하도 흉물이라고 구시렁거리니까 빡친 에펠이 그냥 사무실 겸 침실을 탑 위로 옮겨 버린 것이었다.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에펠 탑을 파리의 흉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당시 시대 자체가 석조 건축에서 철과 유리, 콘크리트 건축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당대의 파리는 석조 건물들만 즐비한 도시였으며 그 중에 홀로 이질적인 에펠 탑은 충분히 혹평 받을만 했던 것. 시간이 지나 기차역 등 많은 거대 시설들이 에펠 탑과 같은 철골 구조를 사용하여 지어지고 나서는 그럭저럭 도시 미관에 녹아 들어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Q.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해체원인은?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91년 슬로베니아 지도부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을 결정했을 당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간부들로 구성된 유고 인민군은 슬로베니아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긴 했으나 전의를 보이지 랂았다. 그것은 슬로베니아에서는 극소수의 세르비아인만 살고 있고, 밀로셰비치의 목적은 실은 유고슬라비아의 보존이 아니라 세르비아인을 한 국가에 모으는 것이었기 때문. 결국 슬로베니아의 독립 전쟁은 10일만에 간단한 협상으로 종결되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궤멸적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는 해당 국가에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세르비아계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서구 좌익들은 미제국주의 폭격에 희생당한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를 변호하는 경향이 있고, 심지어 맨 처음 연방을 탈퇴한 슬로베니아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았을 때 그들이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 지도부에게 그만큼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다소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슬로베니아 독립파와 밀로셰비치의 리해관계는 완전히 일치했고, 그는 개량주의자로 전향한 구 노멘끌라뚜라로서 극우 민족주의 정당 급진당과의 련정까지 감수하며 자기 권좌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서구 좌익이 강조하는 잔존 유고슬라비아의 상대적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성향이라는 것도 실은 밀로셰비치 정권이 우직하게 밀고 나간 깜빠니야가 아니라, 당시 유럽의 정치적 력학관계 속에서 강요된 것이었다. 례컨대 당대 서방 지도자들이 기독교 우익 포퓰리즘을 받아들여 반이슬람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면 이제뜨베고비치가 아닌 밀로셰비치가 서구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당연히 그도 서구에 보답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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