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신라의 화랑 중에 사다함이라는 화랑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진골 출신으로 내물마립간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급찬 구리지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생김새가 깨끗하고 뜻이 곧아 사람들이 화랑으로 추대했다고 한다.신라에 기울어 있던 대가야가 백제와 가까워지자 562년(진흥왕 23) 왕은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정벌을 명령했다. 이때 사다함이 15~16세의 나이로 종군하기를 청하자, 왕이 처음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가 태도가 간절하고 뜻이 확고하여 마침내 허락했다.그가 귀당 비장으로 출정하자 따르는 낭도가 많았다. 먼저 국경 근처에 이른 그는 장군의 허락을 받아 기병 5,000명을 이끌고 기습공격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포로로 잡은 가야인 300명(200명이라고도 함)을 받았으나 곧 놓아주어 양인이 되게 했다. 또 토지를 주었으나 사양하는 것을 왕이 강권하자 알천(閼川)가의 불모지를 받았다(또는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도 함).일찍이 무관랑(武官郞)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는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그가 병으로 죽자 매우 슬퍼해 7일 만에 자신도 17세의 나이로 죽었다.
Q. 일본의 사사키 코지로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름은 남아 있지만, 실제로 존재했는지 의심되는 희대의 검사. 3척이 넘는 장도 모노호시자오를 다루는 미검사(美劍士)이다. 출생은 에이로쿠(永祿) 무렵, 게이쵸 10년~17년에 이름을 떨쳤다고 하지만, 그 진위는 정확하지 않다. 사사키 코지로를 기록한 서적들은 전부 다 연대에 모순이 있고, 최대의 호적수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기록한 「오륜서」에는 그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기록에 의하면 코지로는 에치젠(越前)국 출신이며 토다류(富田流) 종가에서 사사, 긴 타치(太刀)를 즐겨 사용했으며, 스승의 친동생을 꺾은 후 스스로 “간류(岩流)”라 칭했다고 한다. 그 후, 무예의 달인으로서 수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고, 스오(周防)국의 와타가와(綿川)에서 나는 제비조차 떨구는 비검, 츠바메가에시를 고안해냈다고 한다.그 후, 많은 나라의 무예가들을 벌벌 떨게 한 끝에, 사관한 번(藩)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후나지마(훗날의 간류지마)에서 미야모토 무사시와 결투하고, 목숨을 잃는다. 그 장도 때문에 칼집을 지닌 채로는 싸울 수가 없어서 무사시를 앞에 두고 칼집을 던져버리지만, 그 모습을 본 무사시의 한 마디 「코지로, 졌군」은 너무나도 유명하리라.확실한 기록을 가진 일본 굴지의 검호 '미야모토 무사시'. 그 호적수로 알려진 미검사 사사키 코지로지만, 그 실상은 수면에 비친 달처럼 확실하지 않다. “그럴 듯한 인물”은 있었다고 하지만, 현대에 전해지고 있는 사사키 코지로는 사람들이 날조한 가공의 대검호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