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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역사 전문가입니다.

이동광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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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국지 유비는 왜 마지막에 합리적이지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아마도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단순한 부하가 아닌 형제와 같은 존재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은 도원결의를 통해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맹세하였고, 수십 년 동안 전쟁터를 함께 누비며 끈끈한 의형제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런 관우와 장비가 차례로 전사하게 되자, 유비는 큰 충격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특히 관우는 오나라와 위나라의 협공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유비는 그 중 오나라의 배신을 더욱 큰 원한으로 여겼습니다.또한 유비는 촉한의 황제로서 정통성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의 복수를 통해 자신의 명분을 강화하고, 위나라와 오나라에 맞서는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비는 감정과 정치적 계산이 겹쳐 오나라 정벌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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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임진왜란이후 조선은 국비를 왜 방비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 이후에도 병자호란(1636)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지고, 인구와 자원이 크줄어들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군사 체계가 붕괴되고, 국방력도 심각하게 약화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민생 안정에 집중하느라 체계적인 군사 개혁이 미흡했습니다. 또한 전란을 통해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더욱 밀접해져, 명에 대한 의존과 사대 외교가 강화되었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새롭게 떠오르던 후금을 경시하거나 적대시하였고, 현실적인 외교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습니다.정치적으로는 당파 싸움이 심화되어 국론이 분열되었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국가 차원의 일관된 대응이 어려웠습니다. 또한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은 강경한 친명정책을 고수했으며, 후금과의 유화책을 무능이나 굴욕으로 여겨 배척했습니다. 이러한 강경 외교는 후금을 자극하여 결국 조선을 침략하게 만든 것입니다.결국 조선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국방과 외교 모두에서 준비가 부족하였고, 이로 인해 병자호란이라는 또 다른 전란을 막지 못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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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관련하여 궁금해서 질문 올립니다. 조선시대 왕실의 재산을관리한 내수사는 누가 임명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의 내수사(內需司)는 왕실의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왕실의 재정과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내수사의 관원은 국왕이 직접 임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막강한 권한을 가졌습니다. 특히 내수사의 총책임자인 '제조(提調)'는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내수사는 왕실의 토지, 노비, 염전 등 다양한 자산을 관리하며, 이를 통해 왕실의 재정을 확보하고 증식시켰습니다. 또한, 고리대금업이나 토지 임대업 등을 통해 재산을 불려 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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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국의 왕소군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왕소군(王昭君)은 기원전 1세기 전한 원제 시기의 궁녀로, 중국 고대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왕소군은 원래 한나라 황제의 후궁이었으나, 당시 황제가 궁녀들을 직접 보지 않고 화공이 그린 초상화를 통해 후궁을 선택하는 관례로 인해, 뇌물을 주지 않았던 왕소군은 화공에게 아름답지 않게 그려져 황제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기원전 33년,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황제에게 혼인을 요청하자, 왕소군이 선택되어 흉노로 시집가게 되었습니다.이때 황제가 처음으로 왕소군을 직접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랐지만, 이미 혼인이 결정된 후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내야 했습니다.왕소군은 흉노에서 '영호연지'라는 칭호를 받으며 선우의 아내가 되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후에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관습에 따라 그의 아들 복주류약제 선우의 아내가 되어 두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왕소군의 이야기는 중국 역사에서 한나라와 흉노 간의 화친을 상징하는 인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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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북한의 류경호텔 건축 배경과 현재 운영 상태는 어떤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류경호텔은 북한 평양 보통강구역에 위치한 105층, 약 330미터 높이의 초고층 건물로, 북한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입니다. 1987년 착공되어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맞춰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소련 붕괴로 인한 경제 위기와 자금난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2008년 이집트의 오라스콤 그룹의 투자로 외관 공사가 재개되어 2011년에 외벽이 완공되었으나, 내부 공사는 여전히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류경호텔은 외부에 LED 조명을 설치하여 야간 조명 쇼를 통해 체제 선전용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내부는 텅 빈 상태로, 전력 공급과 상하수도 등 기본적인 인프라가 부족하여 실제 운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카지노 설치 계획이 검토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진전은 없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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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왕실의 생과방은 어떤것을 하던장소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왕실의 '생과방(生果房)'은 왕과 왕비의 건강을 관리하고, 궁중에서 제공되는 식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부서였습니다. 또한 '생과방'은 왕과 왕비의 건강을 위해 신선한 과일과 음식을 준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부서는 궁중의 식생활과 건강 관리를 위한 중요한 기관으로, 왕실의 일상적인 건강 유지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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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민족 해외 동포들을 고려인 또는 조선인이라고 다르게 부르는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한민족 해외 동포들을 '고려인' 또는 '조선인'이라고 다르게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해외로 이주한 시기와 지역, 그리고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명칭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고려인은 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민족 후손들을 지칭합니다. 당시 이들은 러시아어로 '코레예츠(Кореец)' 또는 '코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로 불렸으며, 이후 자신들을 '고려인(高麗人)'이라고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이 명칭은 1988년 전소련고려인협회 결성을 계기로 공식화되었으며, '고려'라는 표현은 남북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인은 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이나 중국 등으로 이주한 한민족 후손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당시 조선이라는 국호 아래 이주했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불렸으며, 특히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 중 해방 후에도 남북한 국적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법적으로 '조선적(朝鮮籍)'으로 남게 되어 '조선인' 또는 '조선적 동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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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알프스 산맥 지역에서 수백년간 목격된다는 타첼부름의 정체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알프스 타첼부름은 유럽 알프스 지역, 특히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전통 민속에 전해지는 전설 속의 괴생명체입니다. 이 생물의 이름은 독일어로 ‘발톱 있는 벌레’ 또는 ‘손발 달린 뱀’을 뜻하며, 이름 그대로 뱀처럼 긴 몸에 짧은 다리를 가진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외형에 대한 묘사는 이야기마다 다르지만, 보통 몸길이는 1~2미터 정도이며, 두 개 혹은 네 개의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고, 고양이와 비슷한 얼굴을 지녔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일부 전승에서는 털이 덮여 있거나 비늘이 있으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거나 독을 뿜는다고도 전해집니다.타첼부름은 대개 산 속이나 숲, 동굴 깊은 곳에서 목격되었다고 하며, 가축을 공격하거나 사람에게 위협을 가한 존재로 전해져 지역 주민들 사이에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생물은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각지의 목격담과 민간 전승을 통해 퍼졌으며, 당시 일부 신문이나 기록물에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존재가 입증된 적은 없으며, 실제로는 족제비나 대형 도마뱀, 수달 등의 동물이 잘못 인식된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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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차대전때 일본군들이 써먹었다는 죽순고문은 정확히 어떤 방식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죽순처형은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는 잔혹한 고문 및 처형 방식으로, 대나무의 빠른 성장력을 이용한 형벌입니다. 이 처형은 죄수를 죽순이 자라고 있는 땅 위에 고정시킨 후, 대나무가 자라면서 죄수의 몸을 뚫고 올라오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대나무, 특히 어린 죽순은 하루에 수십 센티미터씩 자랄 만큼 성장 속도가 빠르며, 뾰족하고 단단한 끝이 피부와 살, 장기를 관통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이로 인해 죄수는 심한 고통을 겪으며, 결국 출혈, 감염, 혹은 장기 손상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이러한 처형 방식은 실제로 일본의 중세나 에도 시대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공식적인 형벌 제도로 명확하게 기록된 바는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외국인이나 반역자 등에게 공포를 주기 위한 목적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서양인의 여행기나 민간 전승 등에서 이 처형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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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름만 되면 모기들이 많은데, 모기들은 언제부터 발견이 되었고 그때도 지금처럼 흡혈을 하기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모기는 약 2억 년 전, 중생대 쥐라기 시기부터 지구상에 존재해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공룡이 살던 시대와 비슷한 시기로, 모기의 화석이 이 시기의 지층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 즉, 모기는 매우 오래된 곤충이며, 오랜 시간 동안 진화를 거쳐 현재와 같은 형태와 생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초기 모기들도 지금처럼 흡혈을 했는지는 화석만으로는 완전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모기의 입 구조와 생존 방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암컷 모기가 피를 빨아먹는 습성은 초기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또한 고대 모기가 어떤 동물의 피를 빨았는지는 시대에 따라 달랐을 수 있으며, 초기에는 작은 파충류나 조류, 포유류 등 다양한 생물을 대상으로 흡혈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지금처럼 사람의 피를 빨게 된 것은 인간과 모기의 서식지가 가까워지고, 인류 문명이 형성되면서부터 점점 일반화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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