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대한민국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조선 후기 서학의 일부로 청나라로 부터 전래되었습니다. 즉 서양학문의 일부로 서적 등을 통해 소개되었으며, 남인 실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신앙으로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녀자, 하층민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선교사들도 입국하면서 본격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의 조상숭배, 평등 사상이 조선의 전통 질서와 충돌하면서 탄압이 거듭되었습니다. 1886년 프랑스와 수교 이후 공인되었습니다.개신교는 19세기 훕나 본격적으로 전래되었습니다. 1873년 만주에서 서상륜, 백홍준, 김진기 등이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성서 번역 작업을 시작하면서 조선 최초의 개신교 신앙 공동체가 마련되었습니다. 간행되었고, 1883년에는 한국인 주도로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1884년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의료, 교육, 문화 사업과 함께 선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특히 1887년 서울에 새문안교회가 창립되고, 부산, 대구, 평양 등지에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Q.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왜 실패했을까요?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고종의 친정으로 자신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통상개화론이 확산되어 갔습니다. 박규수, 오경석 등의 통상 개화 사상은 개항과 개화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것도 실패의 원인입니다. 또한 서구 열강의 압박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군사력이 견고하지 안았습니다. 특히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운효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또한 청, 일본 등 주변국도 개항, 근대화의 압력에 굴복한 상황이었습니다.
Q. 조선 후기 실학이 당시 사회에 끼친영향은 뭐였을까요
조선후기 실학은 현실 문제 해결을 중시한 개혁 사상입니다. 실학자들은 양분 중심의 신분제와 토지제도 개혁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중상주의 실학자들은 상공업 진흥 등 구체적 개혁안은 제시했습니다. 백성의 생활 개선을 우선시하고 실증적인 연구와 과학기술 도입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실학의 노력은 조선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사회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씁니다.하지만 당시 실학은 현실 정치에 반영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일부에서는 정책적으로 반영되었는데, 예를 들어 정조 재위시 정약용의 실학 사상은 수원 화성 축조, 배다리가 설계되었습니다. 그리고 과학 기술, 국학, 의학 분야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또한 19세기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어 근대화의 맥으로 이어갔습니다.
Q. 신라의 화랑도는 실제로 어떤역할을 했나요?
화랑도는 본래 원화제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원시 청소년 공동체입니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여 신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화랑도는 무예를 연마하며 전시에 낭도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또한 화랑도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 문무를 겸비한 지도자를 키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자연 속에서의 수련과 유교, 불교, 도교, 샤머니즘 등 다양한 사상을 배워 리더십, 협동심, 정신적 내면을 단련했습니다. 그리고 화랑도는 골품제로 인한 신분 경계를 완화하여 사회 통합의 기능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