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의 토종 뱀 중에서 가장 큰 뱀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토종 뱀 중에서 가장 크고 길이가 긴 종은 유혈목이라는 살무사종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독이 있을 것 같지만, 사람에게 위험한 수준은 아니며 실제로는 꽤 온순한 편입니다.유혈목이는 몸길이가 평균적으로 1미터 이상 자라며, 드물게는 2미터 가까이 성장한 개체도 보고된 적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된 가장 큰 개체는 약 198cm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고, 이는 한국에서 관찰된 토종 뱀 중 가장 긴 사례입니다.말하자면 성인 남성보다도 더 긴 길이를 가진 뱀이 숲이나 들판을 조용히 지나가는 셈입니다. 하지만 크기에 비해 사람을 공격하거나 위협하는 일은 거의 없어서 마주친다고 해도 크게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그 크기에 놀랄 수는 있겠네요.
Q. 해양 생물 중 산호는 식물이 아닌 동물에 속한다고 하는데요
산호는 겉모습만 보면 바위처럼 딱딱하고 식물처럼 가만히 있어서 식물로 오해하기 쉽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분명한 동물입니다. 그 이유는 산호가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않고, 입과 촉수를 이용해 먹이를 잡아먹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산호는 아주 작은 산호 폴립이라는 개체들이 모여 군체를 이루는데, 이 폴립 하나하나가 해파리나 말미잘과 같은 자포동물에 속합니다. 이 동물들은 미세한 플랑크톤을 촉수로 잡아 먹으며, 식물처럼 영양을 만들지 않고 외부에서 섭취해야 생존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비유하자면, 산호는 식물처럼 보여도 사실은 조용히 사냥을 하는 작은 동물들이 모여 사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호는 동물로 분류됩니다.
Q. 노화가 질병이라고 하던데 진짜인가요?
안녕하세요. 윤보섭 전문가입니다.나이가 들면서 몸이 변화하는 노화가 과연 자연스러운 생리적 과정인지, 아니면 질병처럼 다루어야 할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과학계에서도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우선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치 철이 시간이 지나면 녹슬듯, 세포와 장기들도 점차 기능이 떨어지고 손상이 쌓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병이 없어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이다'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하지만 최근에는 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바뀌고 있습니다. 노화를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치료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상태, 나아가 일종의 질병처럼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노화로 인해 나타나는 많은 변화들, 예를 들면 세포 기능 저하, 염증 증가, 유전자 손상 축적과 같은 것들은 실제로 다른 질병들(치매, 심혈관 질환, 암 등)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비유하자면, 노화는 마치 오래된 기계가 점점 고장이 나듯 여러 부품이 동시에 느려지고 낡아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낡는 방식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고, 특정 부품만 교체하거나 기름칠을 잘하면 고장 속도를 늦출 수 있다면, 이건 단순한 운명이 아니라 관리와 개입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특히 유전 정보, 후생유전학, 그리고 mTOR와 같은 노화 관련 신호 전달 경로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서, 노화 자체를 조절하거나 늦출 수 있는 방법이 실제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노화를 만성적이고 진행성인 질병으로 분류하자고 제안하고 있으며, 세계보건기구인 WHO도 최근 노화 관련 상태를 국제질병분류에 포함시키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습니다.결론적으로 노화를 질병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선 아직 학문적 합의는 없지만, 점점 더 많은 연구자들이 노화를 단순히 받아들여야 할 현상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생물학적 상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즉, 아직은 질병으로 완전히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과학 발전에 따라 '치료 가능한 노화'라는 개념에 더 가까워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Q. 과학적 이론은 재생이 가능한걸까요?!
안녕하세요. 윤보섭 전문가입니다.과학적 이론은 기본적으로 재생 가능성이라는, 즉 같은 조건 아래에서 누구나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을 다른 믿음 체계나 개인적 주장과 구분 짓는 핵심 기준 중 하나입니다.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과학적 이론이 되려면 누가, 언제, 어디서 실험을 하든 같은 조건이라면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며, 이런 반복 가능한 성질을 통해서 이론의 신뢰도와 타당성이 확보됩니다. 이를 가리켜 재현성 또는 반복 가능성이라고 부릅니다.예를 들어, 물은 1기압에서 100도씨에서 끓는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수 많은 사람이 다양한 환경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실험했을 때 모두 같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만 80도에서 끓고, 또 누군가는 120도에서 끓는다면, 그 이론은 과학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겠죠.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같은 조건이란 단순히 표면적으로만 비슷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험을 구성하는 모든 주요 요소, 예를 들어 온도, 압력, 물질의 순도, 측정 도구의 정밀도 등이 정확히 통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실험이 복잡해질수록 같은 결과를 재생하는 일도 까다로워질 수 있습니다.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어떤 과학 이론은 엄밀한 재현이 어려운 분야에도 적용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지질학이나 천문학처럼 과거에 일어난 일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실험실에서 똑같은 사건을 다시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공룡 멸종이나 빅뱅은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과학자들은 간접적인 증거와 데이터의 일관성을 통해 이론의 신뢰도를 판단합니다. 이처럼 재현성은 직접적인 실험만을 의미하진 않고, 논리적 일관성과 관측 가능한 반복 패턴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비유하자면 과학적 이론은 잘 짜인 레시피와 같습니다. 누가 그 레시피를 따라 요리하든, 재료와 조리 조건이 같다면 같은 맛이 나야 레시피로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오븐 온도가 조금씩 다르거나 재료가 신선하지 않으면 맛에 차이가 나듯, 과학 실험도 조건이 미세하게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정밀한 조건 관리가 중요합니다.결론적으로 과학적 이론은 기본적으로 재생 가능한 이론이며, 이 재생 가능성은 과학적 타당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재현이 어려운 경우에도 과학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검증 가능한 일관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점이 과학 이론을 단순한 주장이나 의견과 구별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Q. 과학적인 연구를 위해, 경험의 축척이 필요한걸까요?
안녕하세요. 윤보섭 전문가입니다.예,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경험은 과학적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경험 자체가 실험이 되고, 이 과정에서 과학적 이론과 규칙성이 도출되기도 합니다. 단,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지느냐입니다.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경험은 흔히 직관적이고 우연적입니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이 경험을 반복 가능하게 관찰하고, 측정하고, 조건을 통제하면서 체계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실험이라는 틀 안에 넣습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이 과학이 되려면 의도적이고 검증 가능한 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멘델의 사례는 이 점을 아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멘델은 수도원 정원에서 완두콩을 기르며 우연히 특정 형질이 일정한 비율로 자손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이건 그냥 재밌는 현상으로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멘델은 이 경험을 실험으로 전환했습니다.멘델은 완두콩의 색, 모양, 씨앗의 위치 등 여러 가지 특징을 하나씩 분리해가며 교배 실험을 반복했고, 그 결과를 수치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수천 번의 실험 끝에 유전의 규칙성, 즉 우리가 오늘날 멘델의 유전 법칙이라 부르는 유명한 이론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멘델은 경험에서 출발해 실험을 만들고, 실험을 통해 이론을 끌어낸 셈입니다.이런 과정을 비유로 설명하면, 경험은 손질 안 된 생재료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그냥 보기만 해서는 요리가 되지 않지요. 하지만 과학은 그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법을 정하고, 불의 세기와 시간까지 조절하는 조리 과정과 같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단순한 재료에서 반복 가능한 요리, 즉 이론과 법칙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정리하자면 경험은 과학의 시작이 될 수 있으며, 멘델처럼 그것을 반복, 관찰, 기록하는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면 충분히 실험으로 발전하고, 그 결과로 과학적 이론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서 규칙을 찾고 검증하는 시도를 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Q. 서양란과 동양란이라는 이름은 왜 생긴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윤보섭 전문가입니다.난초는 전 세계적으로 아주 다양한 종이 분포하는 식물이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서양란’과 ‘동양란’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자생지를 기준으로 붙은 이름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명칭은 식물학적 분류보다는 문화적 구분에 가까운 개념입니다.실제로 서양에도 난초과 식물은 자생합니다. 예를 들어, 유럽과 북미 지역에는 뿌리를 땅에 내리고 자라는 지생 난초들이 있으며, 이들은 꽃 모양이 다소 소박하고, 관상용보다는 야생 식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우리가 흔히 ‘서양란’이라고 부르는 난초들(대표적으로 카틀레야나 덴드로븀 같은 품종들)은 주로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 열대 지방에서 자생하는 품종들로, 화려하고 크고 진한 향기를 지닌 꽃을 피우는 특징이 있습니다.그렇다면 왜 이들을 ‘서양란’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유통과 재배의 역사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열대 난초들은 18세기 이후 유럽과 북미에서 본격적으로 재배되고 개량되기 시작했습니다. 식민지 시기 열대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들여온 난초들을 서양 원예가들이 온실에서 키우며 관상용으로 개량했는데,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품종들이 전 세계에 퍼지면서 서양식으로 가꾸어진 난초라는 의미로 ‘서양란’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반대로 ‘동양란’은 주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사랑받아 온 난초들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춘란, 한란, 석곡 같은 종류들이 있으며, 이들은 꽃보다 잎의 선과 향기, 자태를 감상하는 문화가 중심입니다. 난초 자체보다도 심는 방식과 감상하는 태도가 서양란과는 뚜렷하게 다릅니다.정리하자면, ‘서양란’과 ‘동양란’이라는 말은 난초가 어디서 자생하느냐보다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가꾸고 감상해왔는가를 기준으로 나뉜 명칭입니다. 마치 같은 커피라도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와 일본식 드립커피가 문화적으로 다르게 불리듯, 난초도 자생지보다는 감상의 전통과 양식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 셈입니다.
Q. 파리는 눈이 매우 발달해 작은 움직임도 잘 감지한다고 하는데요
안녕하세요. 윤보섭 전문가입니다.파리 눈은 우리가 흔히 겹눈이라고 부르는 복안 구조로 되어 있어요. 사람 눈처럼 렌즈 하나로 보는게 아니라, 수천 개의 아주 작은 눈들이 모여 하나의 큰 눈처럼 작동하는 방식이에요. 쉽게 말하면, 작은 카메라 수천 개를 한 덩어리로 묶어서 동시에 촬영하는 드론 카메라를 떠올리시면 좋습니다. 그 많은 눈들이 동시에 주변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거죠.이 작은 눈 하나하나를 '오마티디아'라고 부르는데, 파리는 약 4천개에서 많게는 1만개 가까이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각각의 오마티디아는 특정한 방향만을 바라보지만, 모두 합쳐지면 거의 360도에 가까운 시야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파리는 자기 등 뒤에서 접근하는 위협까지도 바로 눈치챌 수 있죠. 마치 방 안 사방팔방에 CCTV를 설치해두고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느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시간 해상도입니다. 파리는 사람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미지를 처리할 수 있는데, 이걸 쉽게 설명하면, 파리는 마치 초고속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한 순간의 미세한 움직임도 나눠서 볼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손을 휘 하고 움직일 때 파리 입장에서는 그게 느릿느릿한 장면처럼 보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빠르게 다가가도 이미 그보다 앞서 반응할 수 있는 겁니다.정리하자면, 파리는 수천 개의 작은 눈이 모여 있는 복잡한 눈 구조 덕분에 넓은 시야와 빠른 반응 속도를 갖고 있고, 움직임을 감지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건 이 독특한 시각 시스템과 초고속 눈 처리 능력 덕분입니다. 우리가 파리를 쉽게 못 잡는 이유가 그냥 운이 없는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죠.
Q. 손톱이 빠지면 손톱이 그대로 자라는것 같은데 손톱만 만드는 세포가 따로있나요?
안녕하세요. 윤보섭 전문가입니다.손톱이나 발톱이 빠졌는데도 다시 자라는걸 보면 마치 손톱을 만드는 공장이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는 손톱만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세포들이 따로 자리잡고 있어요.손톱은 그냥 피부가 딱딱해진 게 아니라, 손가락 끝부분에 있는 손톱 뿌리(전문용어로는 네일 매트릭스라고 부르는 부분)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부분은 손톱 밑의 피부에 숨어 있어서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손톱을 쉴 새 없이 만들어내는 아주 바쁜 세포 공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손톱이 빠졌다고 해도 이 ‘공장’이 다치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다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손톱은 다시 자라납니다. 마치 종이공장에서 종이가 한 장 나간다고 해서 기계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요.반면 손톱 뿌리 자체가 크게 다치거나 손상되면, 자라는 손톱이 울퉁불퉁해지거나 영구적으로 자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손톱이 완전히 빠졌을 때는 손톱 그 자체보다 그 뿌리 부위가 손상됐는지 여부를 살펴봐야 합니다.그리고 덧붙여서 우리가 손톱을 잘라도 통증이 없는 이유는 이 손톱 자체에는 신경이나 혈관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걸 만드는 뿌리 부분은 혈관과 신경이 풍부해서, 거기를 다치면 많이 아프고 피도 나죠.결론적으로, 손톱이 자라는 건 우리 몸에 이미 손톱을 만들기 위한 전용 세포와 구조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며, 그 시스템이 온전히 작동하고 있다면 손톱은 빠져도 다시 예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Q. 개구리의 유충인 올챙이는 어떤 방식으로 성체로 성장하나요?
안녕하세요. 윤보섭 전문가입니다.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하는 과정은 마치 한 생물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연 속 변신 마법이라고 불릴 만큼 신기하고 아름다운 과정입니다. 전문용어로 이 과정을 변태라고 부르는데요, 단순히 몸집이 자라는게 아니라, 몸의 구조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처음 알에서 깨어난 올챙이는 물속에서 헤엄치며 사는 작은 물고기처럼 생겼습니다. 이 시기에는 아가미로 숨을 쉬고, 주로 식물성 먹이를 먹으며, 길쭉한 꼬리를 이용해 물속을 헤엄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몸에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죠.가장 먼저 생기는 변화 중 하나는 뒷다리입니다. 작은 혹처럼 움푹 솟아오르면서 점점 길어지고, 이어서 앞다리도 나타납니다. 이 다리는 나중에 물 밖에서 뛰어다니고 헤엄칠 때 쓰이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이와 함께 아가미는 점점 사라지고 폐가 발달하면서, 물이 아닌 공기로 숨을 쉬는 준비가 시작됩니다. 마치 물속에서만 살던 아이가 육지로 나가 살기 위해 새로운 호흡기를 만드는 셈이지요. 그리고 아주 결정적인 변화는 꼬리의 소멸입니다. 올챙이 시절엔 헤엄을 위해 꼭 필요했 꼬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사라져버립니다. 이때 꼬리의 조직은 흡수되어 몸의 다른 에너지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내장 기관도 달라지는데요, 초반엔 식물 위주로 먹던 올챙이의 장은 길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지만, 성체 개구리는 잡식성 또는 육식성이기 때문에 장의 길이가 짧아지고, 먹이를 한 입에 삼킬 수 있도록 입과 혀 구조도 바뀝니다.이 모든 과정은 보통 몇 주에서 몇 달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며, 결국 올챙이는 수영하던 물속 생명체에서 뛰고 숨 쉬며 울음소리를 내는 육지 동물로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올챙이의 성장 과정을 보고 있자면, 단순한 성장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물로 다시 만들어지는 일종의 재탄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Q. 사람이 짐승과 다른 이유는 어떠한 것이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윤보섭 전문가입니다.사람도 생물학적으로는 분명 동물의 범주에 속하지만, 다른 동물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 차이를 설명할 때 전문가들은 보통 본능을 넘어서 사고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 주목합니다.먼저 동물들은 대부분 본능에 의해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면 먹이를 찾고, 위험을 느끼면 도망가며, 짝짓기 철이 되면 번식을 시도합니다. 물론 동물들도 학습 능력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행동은 비교적 예측 가능하고 환경에 크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사람도 이와 같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본능을 바로 실행에 옮기기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파도 예의를 갖춰 식사 시간까지 기다릴 수 있고, 분노를 느껴도 상대를 해치지 않도록 참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동차가 가속 페달만 있는 게 아니라 브레이크와 핸들이 함께 있어 방향을 조절하듯, 인간은 본능이라는 엔진에 더해 이성이라는 조절 장치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또한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는 존재입니다. 단순히 생존을 넘어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옳은가?와 같은 철학적, 도덕적 질문을 던지고, 예술과 종교, 문학, 과학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이는 다른 동물들에겐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같은 나무를 보더라도, 동물은 쉼터나 먹이로 인식하는 반면, 인간은 그 나무에 감정을 담아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죠.결국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본능을 넘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의미를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분명 동물적인 본능이 존재하지만, 그 본능을 다루는 방식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핵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