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왕이 다음 사람에게 왕위를 넘기면 그 왕은 상왕이 되는데요 그렇다면 세자의 경우에는 뭐라고 부르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맞습니다. 형식상으로는 세자의 자격이 폐하였으니 폐세자라고 하지만, 공식적인 명칭으로는 세자가 되기 전 위치인 대군 또는 군으로 불리게 됩니다. 왕은 최상위 결과이니 왕이었다가 선위를 하게 되면, 자신은 이전 왕이니 상왕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왕이었다가 왕의 자격이 폐해진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군이나 군으로 명명합니다. 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종 이방원의 정실부인 세 아들 중 첫째인 양녕대군이 원래 왕세자였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왕세자의 자격을 폐하게 되었고, 이후 셋째 아들인 축령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향후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첫째는 다시금 양녕대군의 지위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Q. 왜 합스부르크왕가는 근친결혼을 고집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되기 위해 문서까지 위조해서 귀족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오스트리아 지역의 빈을 문화의 도시로 육성시켰고, 슈테판대성당과 빈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많은 음악가들의 활동무대가 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가문들과 결혼정책을 펼쳤고, 심지어는 황제의 외동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130년만에 황제가문으로 상승했고, 영토도 가지게 됩니다.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세는 부르타뉴 가문의 안과 결혼했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자신의 딸 마르게리따를 결혼시킵니다. 그러나 부르타뉴 영토를 차지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불만을 가진 샤를 8세가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무력으로 부르타뉴를 다시 차지하고 자신의 장모 겪이었던 안과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숙적이 됩니다.이에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가와 사돈을 맺었으나 스페인의 상속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결국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인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국왕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헝가리 왕가와도 사돈을 맺었는데 헝가리 왕이 전쟁에서 전사하자 헝가리 지역도 차지하게 됩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반합스부르크의 성향이 강했기에 합스부르크가에서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그 사이는 프랑스임)를 다스리기에 어려움을 느꼈고, 카톨릭인 스페인은 이교도와 개신교와의 결혼은 금지하고 있었기에 영토를 지키기 위해 혈통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박히면서 궁극적으로 근친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근친혼에 의해 태어난 자식 중 돈카를로스는 지금에 와서 말하는 취약X증후군이라는 유전적 질환을 가졌는데 주걱턱, 짝다리, 정신질환을 자겼었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필리페 4세 국왕은 여동생의 딸과 결혼하는 등 근친혼을 이어갔고, 그의 딸 마르가리따는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정혼합니다. 그녀도 자랄수록 주걱턱이 심해지고 21세에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남동생 카를로스 2세도 38세에 사망하였습니다. 후대에 조사해보니 근친혼일 시 나타나는 유전병에 의해서 스페인 왕실의 자녀 34명 중 50%가 10살 이전에 사망하였으며, 근친혼에 의해 유전병으로 주걱턱 등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10여년간 이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끝에 결국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인 로드링겐 가문의 공작 프란츠 1세와 결혼하면서 근친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슬라브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당하게 되면서 전쟁에서 패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마침내 종지부를 찢게 됩니다.
Q.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가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종교적 이유와 경제적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이베리아 반도는 오랜 기간 가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대립해왔는데, 이베리아 가톨릭 세력의 이슬람 축출 이후 이베리아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해졌지만 이베리아의 왕조들은 이슬람 세력을 경계했고, 동방에 있다는 전설 속의 가톨릭 왕 프레스터 존을 찾아 동맹이 되는 것을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중해를 통해 동쪽으로 가는 것은 오스만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기에 대서양을 통해 반대편으로 간다면 프레스터 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경제적으로는 페스트로 인한 인구 급감하였고 봉건제를 빠르게 붕괴시켰습니다. 노동력 감소로 소작농의 임금이 치솟았고 소작농을 못구한 영세 영주들이 파산하였습니다. 이에 시장과 화폐 경제, 교역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전체적인 국가 경제 팽창이 필요하게 되어 대항해 시대의 실마리가 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교역에서의 향신료의 확보 문제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이슬람과의 교류를 통해서 나침반, 아스트롤라베, 사분 같은 측정기술로 원양항해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해도제작능력이 발달하였습니다. 이러한 항해술을 기반으로 운영될 선박들의 건조기술 등이 발달하여 안정적으로 원양 항해를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지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