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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을 함께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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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전문가
맑은글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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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의 어린이날은 언제 누구에 의해 제정이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9년의 3·1 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자, 1923년 방정환을 포함한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처음에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가 1927년 날짜를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행사만 추진하였고, 1961년에 아동복지법에 공식적으로 어린이날을 5월5일로 명기되었습니다.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975년부터 공휴일로 제정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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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야인시대의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것이 팩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실로 판명된 일로 판단됩니다. 우선 안동김씨 족보에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올라가 있고, 호적에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김좌진은 부인이 여럿이었는데 정실부인과 다른 부인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인정하고 일제 시대와 김두한 사망 이후 1980년대까지도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증언했다는 것을 볼 때 사실이라 확인됩니다. 일제시대 김좌진 아들 김두한을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고 감시했던 일제시대 공식문서가 있고, 김두한이 어렸을때 김좌진 아들이라며 행적을 보도한 당시의 각종 신문기사도 존재하며, 해방 이후에 김구와 청산리 동지였던 이범석 등 독립운동가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공식석상에서도 인정하고 발언하였다고 합니다. 도올 김용옥이 거지였던 이가 자신을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라고 속였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었으나, 1990년대에 김좌진의 여러 부인 가족들과 김두한 가족들이 한 가족으로 방송 다큐에 출연하여 가족이 확실함을 밝혔습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거지 하나가 안동김씨 가문 전체와 국가와 언론과 일본까지 다 속였다는 것인데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에 따른 공식 기록들이 사실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국내의 여러 매체의 내용보다도 철두철미한 일본 정부에서 김좌진을 잡고자 그의 아들인 김두한을 종로를 벗어나지 못하게 철저하게 특별 감시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사실 관계가 확인되었으니 그랬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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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구려의 연호는 언제부터 사용 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한민국에는 고구려에 대한 유물이나 사서가 거의 없는 관계로 확인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통 광개토태왕비문 기록되었는 영락이 최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신라와 발해의 연호 사용에 대해서는 기록되어있고, 특히 발해에 대해서는 연호가 바뀔 때마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북한학계에서 발표한 바로는 발견된 고구려 유적에서 나와있는 것으로 영락 이전에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태왕명 / 사용확인년도 / 연호 / 발견 유적 소수림태왕 / 374-377년 / 태령 / 집안성벽 명와광개토태왕 / 391-412년 / 영락 / 광개토태왕비 (비문 기록으로 다른 설 없이 확실성 인정)장수태왕 / 413-419년 / 연가 / 연가명 금동 여래상 / 451-472년 / 연총 / 서봉총 은합우 / 472-479년 / 건흥 / 건흥명 금동 불상문자명태왕 / 508-511년 / 백선 / 곡산군 경4년 불상양원태왕 / 544-546년 / 태화 / 신포시 금동판평원태왕 / 565-571년 / 영강 / 영강명 불상 광배====================================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되어있는 영락은 이견 없이 확실하게 인정된 것이고, 나머지는 유물에서 확인되었으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있는 듯 합니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 대진국의 경우도 초기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도 초기부터 연호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광개토태왕 이전의 경우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확실하게 인정된 광개토태왕 시기 영락 이후에도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더라고 확실하게 연호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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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통일 신라 신분제도는 어떻게 나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골품은 뼈[골(骨)]의 등급[품(品)], 곧 타고나는 신분을 뜻합니다. 신라시대부터 있었고, 통일신라가 되면서 일부 변경되었습니다.골품제는 신라 지배층, 곧 귀족을 등급으로 구분하는 신분 제도인데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관리하였습니다. 그 아래로 3,2,1두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별한 혜택도 없고, 일반 백성과 구분의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 성골의 경우도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소멸되어 통일 신라 시대에는 진골, 6, 5, 4두품의 4개 등급만 존재하였다고 합니다.골품제는 골제와 두품제로 나뉘어서 관리되었고, 왕과 고위관리가 될 수 있었던 성골, 진골의 골제, 그 이하 관리와 귀족층을 구분하는 6, 5, 4품제가 그것입니다. 사실상 이것은 왕경, 즉 수도권에서만 운영되던 제도이고, 지방의 호족들은 4, 5품의 대우를 해주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두품제를 시행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즉 신라에서는 수도권과 지방권을 분리하여 관리했다고 볼 수 있네요.골품제는 그들의 골품을 유지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한다던가 동일계급간 혼인을 하는 폐쇄적인 신분제도였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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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에 편지 같은 것들은 어떻게 전달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는 개인의 우편물은 대부분 사람이 직접 전달하였습니다. 글을 아는 중상위층이 주로 사용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가지고 가던지 가노를 시켜 전달하게 했습니다. 근대적인 우편제도가 실시되기 전의 통신 방식은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서에 이르는 도로 곳곳에 역을 세워놓고 말을 갈아타고 달리며 공문 등을 전하는 역전제였습니다. 또다른 말로는 우역제라고도 합니다.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는 편의가 아닌 공무 또는 지배계층 즉 양반들이 이용하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걸어가 전하는 것을 우(郵)라 하고 말을 타고 가 전하는 것을 역(驛)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역제는 말을 타거나 걸어가 공문서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죠. 긴급을 요할 때는 말을 타고 달리며 통신 업무를 수행했고, 급하지 않으면 걸어가 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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