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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을 공유하고 모르는 것을 함께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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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전문가
맑은글터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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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은 왜 불교를 탄압하교 유교를 앞세웠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고려 말 상황은 군부의 핵심들이 왕권을 위협하며 난장판이었습니다. 거기에 당시 최영이라는 군부 핵심이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죠. 마지막까지 그와 대립하다 위화도 회군을 빌미로 역성혁명에 성공하고 당시 왕을 강제로 내리고 공양왕을 옹립했다가 결국에는 그도 파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 당시 기존 고려의 것을 멀리하고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제일 먼저 국호를 바꾸는데 그것이 조선입니다. 사실 조선은 과거의 고조선에서 따온 것이라기 보다는 과거에 썼던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져다가 쓴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조선과 근대의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명명한 것이지 공식명칭은 조선이었습니다. 당시 동북아 강대국이었던 중국의 명나라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외교적으로 공식 국호로 사용하게 됩니다. (당시 힘이 없어서 명나라가 국가로 인정해야 했으니 짜증이 좀 나네요 ㅎ)그리고 조선의 건국은 사상적으로 불교가 아닌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고려 불교의 영향력이 강해져 고려 후기에 이르러 불교의 패해가 심해지고, 부패하여 권력화 되어 국가를 위기에 빠지게 했던 과오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이었던 정도전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고려의 3대 악을 부패한 불교, 왕권을 위협하는 특정 군부세력, 그리고 유약한 왕권으로 규정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성리학의 반석 위에 나라를 세우기를 바랐습니다. 이성계는 그것을 실현시켜 줄 도구였던 것이죠. 하지만 그 도구의 힘과 야망을 간과하였기에 이후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이성계, 정종, 태종 이방원으로 이어지면서 정도전의 바람대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불교를 억제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세속에서 멀어져가고 점점 산으로 산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몰락은 정치적인 이유와 불교계 자체의 부패가 이유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를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불교계에 지원하던 많은 혜택들을 몰수하였고, 이에 더 발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국가의 전란 시에 승병 등이 국가에 기여하면서 명예를 회복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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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0년대 초반에 당시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었던 김을한이 병원에 입원 중이던 덕혜옹주를 방문하였다가 충격을 받아 반드시 귀국시켜야 한다고 결단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961년 11월 김을한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를 만나, 병상에 있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의 사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귀국은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은 덕혜옹주와 영친왕이은 부부의 귀국을 적극 돕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했고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유모 변복동 및 상궁들, 그리고 옛 학교 친구의 마중을 받으며 37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고 합니다.생활은 낙선재에서 했으며,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다가 이후 통원치료 할만큼 경과가 좋아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89년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4월 25일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아버지 고종의 무덤인 홍유릉(洪裕陵)의 부속림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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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국시대 시기 신라는 왜 가장 늦게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의 경우 특이한 부족국가의 형태로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박, 석, 김 성을 가진 핵심세력들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습니다. 처음 박혁거세가 주위 6개의 부족을 통합하여 신라를 건국하고, 그 부족의 포섭을 위해 핵심되는 세력들이 번갈아가면서 왕을 했기 때문에 권력의 분산도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신라는 김씨성으로 왕족이 단일화되었고, 엄격하게 골품제라는 신분제도 내에서 승계를 해나가면서 권력도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 지도자를 '거서간(시조)→차차웅(무당)→이사금(왕,우두머리)→마립간(왕,우두머리)→왕'으로 당시 중국 및 주변국에서 사용하는 명칭으로 바꾸면서 중앙집권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왕이라는 호칭은 문무왕 때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를 기점으로 불교를 국교로 들이면서 종교를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다보니 건국부터 단일 왕권을 가졌던 고구려나 백제보다 초기에는 발전이 더뎠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가장 늦은 시기에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으나, 국력이 약했지만 외교력이 강했고, 이에 외교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넘기면서, 뒤로는 국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렇게 100% 삼국의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였어도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중 가장 마지막에 남아 한반도를 차지한 국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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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알베르 카뮈가 프랑스 사람이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에 프랑스령 알제리 콩스탕틴 주 몽도비에서 태어났고, 1960년 1월4일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 빌블르뱅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많은 식민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알제리는 단순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생각할만큼 각별하여 프랑스 사람들이 본토로부터 기회의 땅이라고 많이 이주하였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부모도 그랬습니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알제리는 독립 국가이기 때문에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 지역에서 태어났으니 알제리 사람 아닌가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애초에 프랑스 국적을 가진 순수한 프랑스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여 운영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자녀를 낳았고, 국적도 일본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대한민국이 독립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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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왕의 딸을 부를 때 '옹주', '공주'라고 부르는데, 무슨 차이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실부인 즉 중전에게서 낳은 자손은 아들은 대군, 딸은 공주라 부르고, 후궁에게서 낳은 자속은 아들은 군, 딸은 옹주라고 부릅니다. 부름에 있어서 차이는 있었으나, 후계로 낙점된 세자가 아니고서는 대우는 동일하다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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