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정치에서 어떤 이념과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은 성리학의 기반에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결국에 죽임을 당하였으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고려시대 무신들의 폭정에 의한 국가 운영에 환멸을 느꼈고,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성계는 변방의 실력자로 충분히 왕이 될 자질을 갖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선봉장은 이성계를 필두로한 무인 세력이었으나, 그 국가 통치이념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원래 무인세력이었던 이씨조선이 무인들을 기반으로 정치를 펼 수 있었지만, 이후 똑같은 무인들에 의한 세력다툼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점차 무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켜나갔습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의 경우 자신의 스승이자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죽게 하였지만, 자신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도 형제들까지 숙청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더욱 강화해나갔습니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는 성리학의 학파에 따른 사림들이 출몰하였고, 그에 따라 알력과 이해충돌이 되면서 지금처럼 당파가 나뉘게 되고 붕당정치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집단들이 왕권과 인척관계를 맺음에 따라 더더욱 권력을 강화시켜가게 됩니다. 즉 조선시대는 성리학 기반의 학연과 혼인 관계에 의한 혈연이 통치 및 권력의 주요 요소였습니다. 이에 당시 성리학의 근원지인 명에 고개를 숙이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을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중화사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리학은 순수한 학문이라기보다 교조화되고 정파화되어 단순한 통치이념으로 각인되었기에, 조선 중기 이후부터 학문이 실제 생활과 접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치가 제기되면서 실학이 대두되었고, 당시의 개혁사상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학은 국가운영에 대한 중심에 설 수는 없었고, 병폐가 만연한 성리학의 동떨어진 현실감을 비판하는 정도의 운동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Q. 삼국시대~조선 시대에는 복층 건물은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까지는 복층건물도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시대에 건축되었던 황룡사 9층 목탑(고려 고종 25년 몽골 칩입 때 화재로 소실)을 건축했던 것만 보아도 고층으로 목조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는 입식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한옥도 복층의 건물도 있었습니다. 온돌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조선시대 경신대기근이라는 재난 이후로 본격적으로 온돌이 보급되었습니다. 대부분 목조건물을 토대로 한 것이 대부부이었기에 온돌은 1층에 자리하게 되었고, 지금의 보일러 시스템 기술수준이 아니었기에 2층가지 온돌을 놓기는 어려워 단층 위주였고, 복층이 있더라도 1층은 생활공간 2층, 3층은 서고 또는 창고 형태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죠. 궁궐에도 경회루의 경우 지금의 필로티 방식으로 1층은 기둥으로만 되었고 2층이 연회를 할 수 있는 자리로 되어있었던 것을 보면 고층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은 있었다고 보입니다. 온돌의 사용과 그 생활의 고착화로 점차적으로 복층의 한옥 등은 사라지게 되었다 추측됩니다. 서민들의 초가집은 구조상 복층 자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그리고 고려시대까지는 황제국가이었고, 조선시대는 성리학자들의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로 명나라를 대국으로 인정하는 외교를 펼쳤기에 궁궐도 명나라보다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민가들도 궁궐보다는 낮고, 작게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은 복층의 한옥이 조선말기~일제강점기에도 남아있었기에 그 이유는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궁궐은 상징적인 건물이니 그랬다 해도 민가는 복층 건물이 존재했으니까요. 현재는 보일러 기술이 발달하여 최근에 지은 한옥촌의 한옥들은 2층 이상으로 지어지는 곳도 많이 보입니다. 한옥의 기술과 우리나라 온돌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더 높고 멋진 한옥들이 많이 지어졌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