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대중 목욕탕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정착되어 대중화가 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는 박혁거세 신화나 김알지 신화에서 나오듯 알에서 태어난 이들을 냇가에서 씻기자 광채가 났다고 하여 오래 전부터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해 씻는 것을 중요히 여겼으며 불교가 전래 된 후 불교식 목욕재계 개념과 더불어 몸을 청결히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1905년 서울 서인동에서 한국 최초 대중목욕탕이 문을 열었는데 모르는 사람끼리 벗고 목욕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금방 문을 닫게되며, 일제강점기 일본식 목욕탕 문화가 유입되어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일본인이 많이 정착한 부산의 경우 1909년 부산 시가지에서 온천이 있는 동래까지 부산전차를 만들어 온천 셔틀로 돌리기도했습니다.1924년 평양에 , 1925년 서울에 대중목욕탕이 들어서지만 당시 사람들은 거부반응을 보여 정착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목욕 풍습이 계속 이어지고, 대중목욕탕 또한 이태리 타올과 목욕관리사가 생겨나며 한국식 목욕탕이 만들어졌으며, 1990년대까지 목욕탕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Q. 이순신의 자살설과 살아있다는 말은 왜나온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살설은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이 스스로 적들에게 몸을 드러내 총탄에 맞아서 죽었다는 이야기로, 이 이야기는 의병장 김덕령의 전기의 한 구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당시 이순신은 임금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다 간신히 살아난 경험이 있고,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김덕령 장군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게됩니다.그래서 더러운 꼴을 보지 않고 가족과 부하들에게도 짐이 되지 않게 마지막 전투가 될 수도 있는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버렸다는 이야기 입니다.그러나 결사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한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고 죽음을 재촉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며 노량해전은 일본과의 마지막 전투도 아니었고, 당시 왜적들은 일본으로 안전하게 도망가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 장군이 죽은 후에 살아남은 왜적은 별 탈 없이 일본으로 넘어갔습니다.또한 은둔설은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위장한 뒤 아산 근처에서 은둔해 살았다는 이야기로, 이순신의 장례가 늦게 치러지고 별 이유없이 묘를 이장했다는 사실로 이러한 설이 나오게 되었지만 이 는 근거 자료가 부족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전투에서 빠져나와 숨었다는 내용으로 납득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Q. 첨성대는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 졌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적으로 첨성대는 별을 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나 광복 이후 새로운 견해가 나옵니다. 삼국사기에 첨성대의 기록이 등장하지 않고, 삼국유사에도 명칭과 용도, 사람이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그렇다고 해도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하며 천문 관측을 하는 시설인데 정작 다른 천문대처럼 산 위나 높은 곳이 아니라 왕궁 옆의 평지에 건설되었다는 점이 의문으로 제기되었습니다.그러나 산 위로 올라가야 천문 관측이 가능하다는 것은 도심지가 개발된 현재 시점에서의 생각일뿐, 당시 전등도 없던 시기 천문 관측을 방해할 빛 공해가 없었고 지상에서 10m더 올라간다고 해도 별을 관측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천문대를 산 위에 세움은 별과 가까워지기 위함이 아니라 빛 공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또 첨성대의 역할이 기념비, 제단 , 창고 였을 것이라는 설은 종교적 상징물, 과학 수준을 과시하는 상징물,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이 자리에 과거 천문대가 있었으나 목조 건물이었으므로 지금은 사라지고 폐사지의 석탑, 포석정지의 석구 처럼 천문대의 부속 건물만 남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추측일 뿐 문헌적,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불가능하며 주류 학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통설과 신라 천문 기록의 정황 연구 등을 토대로 첨성대가 천문대였음을 정론으로 합니다.
Q. 오귀스트 로댕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귀스트 로댕은 근대 조각의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이 제작한 티파늄에 위치한 조각으로 처음에 제작되었습니다.지옥의 문은 로댕이 중세의 이탈리아 시인인 단체의 에서 영향을 받아 제작한 조각으로 문에는 지옥으로 향하는 인간의 고통과 번죄, 죽음을 보여주는 인물 조각상들이 펼쳐집니다.로댕은 여기에 이들을 재판하는 절대 신인 그리스도의 형상 대인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는 생각에 잠긴 사람의 조각상을 문의 상부 중앙에 위치, 이는 고뇌하는 시인 단테를 염두에 두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벨기에의 브뤼셀에서 7년간 생활할 무렵 로댕은 파리의 살롱전에 출품하기 위해 청동의 시대 라는 작품을 만들지만 모델에 석고를 씌워 만들었다는 모함을 받고 고초를 겪고 있었지만 프랑스 미술부 차관 에드몽 투르케가 로댕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투르케는 로댕에게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당시 건축 중이던 장식미술 박물관의 입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당시, 단테의 신곡은 프랑스 문학과 미술계의 단골 메뉴로 틀라크루아 역시 를 그렸으며 조각가 까르포는 배가 고파 아들들을 잡아먹는 우골리노를 조각했는데 로댕은 여기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