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제물포라는 지명이 인천을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명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제물포는 제물량영에서 따온 제물과, 물이 들어오는 곳을 뜻하는 포가 합쳐진 지명이다.정확히는 현재의 중구 일대(신포동을 중심으로)를 말한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전에는 인천도호부의 중심지가 미추홀구 문학동, 관교동 일대였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 이후 인천도호부의 사실상의 중심지는 현재의 중구로 이전되었다.'제물포'를 인천의 옛 이름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다고 얘기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부산광역시의 '동래'와 다르게 제물포는 인천도호부 전역을 가리키던 옛 이름이 아닌, 개항 이전에는 고작 인천도호부 다소면 해안가에 있던 조그만한 어항을, 개항 이후에는 좁게는 신포동 일대, 넓게는 개항장 일대를 가리키던 말이었기 때문.다만 지금의 서울특별시가 해방 직후 잠시동안 '경기도 서울시'였던 적이 있듯이 인천도 1945년 10월 10일부터 동년 10월 27일까지 단 17일 동안 '경기도 제물포시'였던 적은 있다.지금은 중구 그리고 제물포역 인근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중구 내륙 지역과 동구를 통합해 제물포구를 신설하려는 행정구역 개편이 예정되어 있다.
Q. 중국 청나라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의 새로운 궁궐을 지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보통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의 궁궐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사실상의 관습처럼 굳어졌는데,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자금성에서 몰아낸 뒤 자금성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사실 청나라는 북경을 장악한 후 바로 중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 40년간 남쪽과 서쪽의 남명, 정성공, 이자성, 준가르와 계속 전쟁을 벌이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삼번의 난이 터져 한가하게 궁전을 새로 지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만주족들은 북경에 입성해 본 자금성의 화려함에 크게 만족했기 때문에 굳이 비용이 많이 들고 백성의 원성을 들을 게 뻔한 새 궁전을 짓는 대신 자금성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게다가 청나라는 이자성의 난 때문에 자살한 숭정제의 원한을 갚아준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오삼계가 이 명분으로 산해관을 열어줘 청군이 이자성군을 북경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청나라는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의미에서 기존의 궁궐을 쓰는 게 나았다. 이렇게 자금성을 그대로 쓰면서 원래 청나라의 정궁이었던 선양고궁은 행궁으로 격하되었다.만주족이 자금성을 재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여러 전각을 수리하거나 개축하는 소규모 공사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구조 자체는 명나라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Q. 기독교 세계의 십자군 원정이 도덕적이지 않았던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십자군에 대한 근현대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십자군의 명분과 도덕적으로 결함되는 행동들을 지적한다. 교황이 십자군을 파문하는 경우도 있었음이 이를 증거한다. 십자군들은 이동하는 경로상에서 약탈을 저지르곤 했고, 십자군 지도자들은 획득한 영토를 본래 명분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하기보다 자기 영토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민중 십자군 때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군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라인란트 학살), 제4차 십자군 때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 약탈당하기도 했다.
Q. 현재 시간은 12자리를 사용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해, 달, 별은 모두 원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원은 아주 친숙한 도형이고 하루를 표현할 때도 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개념이 정확히 잡히지 않았을 때부터 사람들이 쓰던 시계가 있었으니 바로 해시계입니다. 해시계 역시 기본적으로 원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원은 각도상 10등분 보다는 12등분하기가 쉽기 때문에 해시계의 눈금을 12개 그리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필요에 따라 12란 숫자는 2, 3, 4, 6 등으로 나누어 떨어질 수가 있으니 시간을 표시하는 숫자로서 매우 좋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루를 12 혹은 24로 나누어 사용하게 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