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마거릿 미드 문화 인류학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의 인류학자인 마거릿 미드는 1929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고, 1925년부터 39년까지 사모아·뉴기니·발리섬에서 원주민들의 생활을 조사했다. 주로 오세아니아 원시 종족들을 연구했으며, 인간의 행동을 생물학적 요소가 아니라 문화가 결정한다는 문화결정론을 주장했다. 성 역할의 차이를 문화가 결정한다는 이 이론은 여성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학문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뉴욕시 미국자연사박물관의 명예관장을 지냈고, 사후에는 미국 자유 훈장을 받았다.대표작은 , 등이 있다.
Q. 자장면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체 개발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짜장면의 유래라 할 수 있는 작장면(炸醬麵)과는 큰 틀에선 형태상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지만 세부적인 모양이나 맛 등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작장면의 존재를 말로만 들었지 직접 접하지 못한 한국인들은 짜장면이 중국집에서 파니 당연히 중국 요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중국과 대만에서도 작장면을 먹기는 하나, 대개 북경이나 산둥성 일대의 향토음식으로 취급받는 경향이 있었고, 21세기 들어 한류 드라마 등을 통해 접한 경우도 많다. 또한 중국 현지의 작장면 매니아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던 시절에 한국에서 짜장면이 대중적이라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짜장면을 맛봤다가 작장면이 뭐 이렇게 달고 기름지냐면서 이건 작장면이 아니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나 작장면과 짜장면은 완전히 다른 음식으로, 한국의 짜장면은 기원만 중국 요리인 사실상 한국 요리이나 마찬가지이다.
Q. 천추태후의 남자 김치양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그는 동주(洞州, 현 황해도 서흥군) 출신으로 천추태후의 외가 쪽 친척이다. 고려 왕실의 친척이라는 점 때문에 동주 지역의 유력 호족이었던 김행파(金行波)의 후손이었음이 유력해보이는데 왜냐하면 김행파의 두 딸은 태조의 후궁인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이었고 그도 태조에게 김씨를 사성받아 동주 김씨의 시조가 되는 등 이미 고려 왕실과 인척관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김치양은 승려를 사칭하면서 궁궐에 드나들다가 천추태후와 눈이 맞아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해서 성종이 유배보냈다고 한다.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이미 승하한지 오래였고 김치양도 승려를 사칭했다고 하니 일단 부인은 없었던 것 같지만 이건 지극히 현대적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생기는 오류이다. 아무리 고려가 재혼이 자유로웠다 한들 왕실 여성, 그것도 왕후라면 문제가 된다. 이는 권력 때문인데 왕의 어머니인 태후가 재혼하면 명분상으로 김치양은 왕의 새아버지와 같은 지위가 된다. 거기다 치양은 왕족도 아닌 김씨였으니 국왕 자신의 정통성, 권위, 권력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일이었던 셈이다.태후가 김치양과 단순히 즐기는 정도였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성종이 승하하고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김치양은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천추태후의 측근이자 연인으로 공공연히 궁궐을 들락거리다 결국 태후와 아들까지 낳아버렸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사랑에 힘입어 합문통사사인(閤門 通事舍人)에서 우복야 겸 삼사사의 지위에 오르는데 권세가 대단해져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고 재산을 축적하며 태후의 지위를 이용해 죄없는 신하들을 많이 모함했다. 또한 자신의 집을 자주 늘렸고 뇌물을 받고 관직을 정하였으며 자신의 집과 호수 공사에 백성들을 노임도 주지 않고 마음대로 동원하여 부려먹는 행패를 저질렀다. 목종은 그를 싫어했지만 어머니에게 약했기 때문에 차마 쳐내지 못했는데 김치양의 행동은 점점 도를 넘어서서 목종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기회로 태후가 낳은 자기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한다. 김치양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태후의 동생 헌정왕후의 아들인 태조의 손자, 당시 왕위에 제일 가까웠던 대량원군 왕순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한다. 목종도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대책을 세우게 되는데 북방 지역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장수 강조에게 비밀리에 연락해서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서 자신을 보위하고 김치양의 세력을 몰아내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강조는 목종까지 폐위하는 강조의 정변을 일으키고 이와중에 김치양은 강조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함부로 권세를 휘둘러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세력 및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Q. 베토벤이 청각이 약했던 시절 음의 진동을 촉각으로 느끼려 노력했다는데 큰 도움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주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즉흥연주로 이름을 떨쳤던 베토벤은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도 신체적 본능으로 음악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귀로만 듣지 않고 몸으로 만들고 듣는 음악입니다.말년의 베토벤이 리드미컬한 곡, 짧고 귀에 꽂히는 동기를 활용하는 곡을 많은 쓴 것은 난청인이 리듬을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고 짧고 특징적인 선율 조각이 청각 기억에 담기 쉽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의 음악적 위대함은 청각 장애를 극복한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귀가 멀면서 기존의 방법들을 조금씩 개선해 간 덕분에 가능해졌습니다.결과적으로 베토벤은 선배 작곡가들이 만들지 못한 소리를 창조했습니다. 귀로는 파악하기 힘들만큼 복잡하고 장대한 구조, 이전에는 금기시됐던 불협화음의 빈번한 사용, 악상의 갑작스러운 변화 같은 20세기 작곡가들의 시도를 베토벤이 200년 전에 이미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