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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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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역사적으로 의사들의 복장은 왜 하얀색인걸까요? 어떤 역사적 유래가 있는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세시대에는 성직자가 의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아 검은색의 가운을 입고 진료를 했습니다. 당시 검은 의복은 사제의 옷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의 색, 성취의 색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졸업식 때 검은 가운을 입는 것도 지금까지 내려온 검정 색 의상에 대한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검정 가운에 환자의 피와 고름이 묻어있으면 경험이 많은 의사라 생각하고 치료가 더 잘 된다는 믿음을 가졌을 정도였습니다.18세기 산업혁명으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과학자들은 안전과 보호를 위해 흰 색의 가운을 입게 되었습니다. 세균학이 발전하고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의학도 현대과학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실험실에서 입던 옷을 의사들도 입게 되며 의사 가운이 흰색이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하얀색 가운을 입자고 주장한 것은 20세기 초 뉴욕대학의 외과 의사였던 Dr. Mark Hochberg였으며, 20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일반적인 의사들은 흰색 가운을 입게 되었습니다.흰 색은 더러운 것이 묻으면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옷을 통한 세균 전파를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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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기술교육기관에는 어떤것들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는 문무관 중심의 양반관료체제가 형성되어 기술직 전담 계층은 중인 신분이 자리잡게 되었다. 기술관의 신분은 중인층 이외에 양반계층에서 도태된 서얼 및 양인(良人) 신분에서 충당되었다.1392년(태조 1) 8월에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7과(科) 중 기술과, 즉 잡과에 해당하는 것은 역과(譯科)·의과·음양과·이과(吏科)의 4과였다. 이 4과는 고려시대의 잡과에 비하면 율(律)·서(書)·산(算)·삼례(三禮)·삼전(三傳)·하론(何論)이 없어지는 대신 이과와 역과가 신설된 것이었다.그러나 그 뒤에 조선 초기의 4과 중에서 이과가 없어지는 대신 율과가 추가되어 조선시대의 기술과는 역과·의과·음양과·율과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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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글 창제 이후 조선시기 내내 한글은 어떠한 대우를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양반들은 한글을 낮추어 암글 또는 암클이라고 불렀는데 이 호칭은 한글은 천한 여인네들이나 쓰는 천한 글이라며 한문을 중시했던 양반들이 비하하여 부른 것으로, '언문'에 비해서 매우 천박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지만 정작 한글이 여성들에게서만 쓰였다는 근거는 없다. 물론 처음에는 주로 사대부의 아내들과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 때 암클이라고 불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점차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 사대부의 처와 일반 백성들이 주로 사용하다가 점차 사대부들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애초에 창제자인 세종 역시 성별과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마다 쉽고 널리 쓸 수 있도록' 창제한 글이라고 반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초창기에 아주 안썼을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발견된 최초의 한글 편지는 1490년 군관으로 함경도에 파견되는 나신걸이라는 남성이 부인에게 쓴 편지다. 훈민정음이 반포되어 30년된 시점에선 이미 사대부들도 일정수준 이상 한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 중기엔 한글 주석이 달린 유교경전이 발간되고 있었고 유교 경전에 대해 가르치고 그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어디까지나 사대부 계층이므로, 사대부들이 한글을 천시했다기 보단 한자의 보조 학습이 가능한 쉬운 글자로써 받아들였다는 것이 좀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게다가 후기에 들면 정조가 왕세손 시절에 쓴 한글 편지같이 왕족도 한글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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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에 보빙사로 갔다온 홍영식이 조선으로 돌아와 1884년 4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설치하고 초대 총판으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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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은 압록강 790km(803km) 이고,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은 낙동강 510km 입니다.압록강의 경우 한국과 북한의 공식기록이 달라 둘다 적었습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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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박지원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암 박지원은 1786년 정조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고 이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ㆍ제릉령(齊陵令),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에 사퇴했다가 1797년 다시 면천 군수(沔川 郡守)가 되었다.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하였으나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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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빗살무늬 토기는 그릇인데, 왜 밑에를 뽀죡하게 만든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석기인들이 살았던 곳은 강변, 즉 땅이 평평하지 않은 모래사장 인근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토기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모래를 파서 밑부분만 묻어 세우거나 아궁이같은 구조물로 지탱하여 썼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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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왕의 딸을 부를 때 '옹주', '공주'라고 부르는데, 무슨 차이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옹주라는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왕의 후궁을 칭하기도 했습니다.고려시대에는 왕의 딸을 궁주라 하였고, 왕자의 정실부인, 그리고 왕족(종친)들의 정실부인과 그 딸까지도 옹주라 하였습니다.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대군의 부인, 왕의 후궁, 왕의 서녀, 개국공신의 어머니와 처, 왕세자빈의 어머니, 종친 딸 등높은 신분의 여인들을 옹주라고 칭하였으나 조선중기로 넘어가서는 내명부 품계를 정리하여서 왕의 서녀만 옹주라고 칭하게 됩니다.옹주는 공주와 똑같은 무품계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한 등급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후궁인 어머니의 신분이 왕비와 차이가 나다 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신분이 양반인지 평민인지 천인 출신 궁녀인지에 따라서도 대우가 달라졌습니다.그러나 기본적으로 왕의 딸이라는 고귀한 혈통과 지위를 가지고 사회적/경제적으로 등 많은 혜택과 특권을 누렸으며, 공주와 마찬가지로 왕실 가족으로서 권리를 가졌습니다.조선시대 양반가의 서녀들이 시집가는 집안보다 훨씬 더 떨어지는 집안으로 시집가거나 비슷한 집안의 서자에게 시집가거나 또는 첩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다르게 옹주도 공주와 별반 다른 것 없는 명문가 집안의 자제와 결혼을 하였으며 시부모나 남편이 옹주에게 반말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서녀라고 하더라도 왕의 자식으로서 당시 조선시대에서는 굉장히 고귀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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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사람들 평균 수명이 어느 정도였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시대의 신분에 따른 평균수명은 환관 70세, 양반 51~56세, 27명의 왕들은 47세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평민들의 평균수명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35세 내외, 혹은 그 이하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유추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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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메디치 가문의 몰락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때 이탈리아 최대의 가문으로 불렸던 메디치 가문은 무절제가 어떻게 실패에 관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가문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으며 두 명의 교황,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었다. 또한 많은 인문학자들을 지원하면서 당대의 지식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 가문은 채 400년이 가지 못해 스스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리더십의 부재였으며, 그 리더십의 부재에는 무절제가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코시모 3세(Cosimo III de' Medici)는 욕망에 휘둘린 결혼 때문에 골치를 앓았고, 폭식과 무절제한 생활을 했으며 주색잡기에 골몰했다. 이렇게 되자 통치를 담당하던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다스리던 피렌체 시민들과 단절된 채 가혹하게 거둬드린 세금으로 향락을 즐겼다. 절제는 찾아볼 수 없었고, 욕망이 넘쳐났다. 결국 메디치 가문은 외국의 군대에게 점령당해 끝내 모욕을 당하고야 말았다. 무절제는 당대 최고의 부자이자 명문가를 몰락의 길로 안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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