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크라이나가 왜 유럽의 식량창고로 불리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 3대 곡창지대는 북미의 프레리,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우크라이나의 흑토지대가 꼽힌다.우크라이나의 농업적 특성은 전 국토의 41%가 러시아어로 ‘초르노젬(Chornozem)’이라고 불리는 검은 흙, 즉 흑토라는 데 있다. 농업에 최적화된 전 세계 흑토의 4분의 1을 우크라이나가 차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삽만 있으면 우리나라 흙에서는 무엇이든 재배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우크라이나는 흑토 외에도 서쪽의 카르파티아 산맥과 크림반도 내 크림 산맥지대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경작에 유리하다. 이처럼 기름진 땅과 유럽 내 가장 큰 국토면적(러시아 제외)을 가진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부터 유럽 최대의 농업생산국이었다. 우크라이나가 과거부터 ‘유럽의 빵바구니(bread basket)’ ‘소련의 식량창고’라고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소련 스탈린 집권 시절 급격한 공업화에 필요한 대규모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소련 당국이 서방에 제공했던 것이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농산물이었다. 우크라이나의 희생으로 소련의 공업화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우크라이나는 지금도 유럽에서 최대 농업강국 중 하나다.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인 딜로이트에 따르면 농업 종사 인구는 전체 우크라이나 노동력의 15%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인 100명 중에 5.6명이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숙련된 농업 기술자들의 임금은 매우 저렴하다. 우크라이나 농업 분야의 시간당 평균 보수는 2달러로 독일(40달러)은 물론 러시아(3달러)보다 싸다. 노동력 요소만 따져보아도 우크라이나가 남다른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12년 우크라이나의 식량 수출 규모는 150억달러가 넘고, 농업이 우크라이나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달한다. 키예프에 소재한 투자은행인 콩코드캐피털은 자체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수입하는 북아프리카나 유럽과 가깝고, 잘 개발된 철도와 얼어붙지 않는 바다를 통한 물류가 발달되어 있다”며 “임금이나 토지 임대료가 유럽은 물론 남미 국가들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평가했다.우크라이나가 생산하는 농작물은 다양하다. 빵의 원재료인 밀을 비롯해 보리, 옥수수, 사탕무 등 다양하다. 재배한 해바라기에서 추출한 해바라기유(油)와 보리를 가장 많이 생산·수출하는 나라가 우크라이나다. 밀과 옥수수 수출은 각각 세계 3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체 보리 수입물량의 60% 이상을 우크라이나에서 들여오고 있고, 이집트는 우크라이나산 밀과 옥수수의 최대 수입국이다.
Q. 말라카해협은 지정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말라카 해협(Strait of Malacca)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서, 인도양과 남중국해 및 태평양으로 연결하는 해로입니다. 이 해협은 페르시아만에서 한국, 중국, 일본 및 태평양 지역 등의 아시아로 가는 가장 짧은 바닷길입니다.말라카 해협의 특징앞서 언급했듯이, 말라카 해협은 인도-중동-아프리카 지역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을 최단거리로 연결할 수 있는 해상 루트입니다. 그 때문에 전세계 해상운송량의 20%~25%가량이 이 항로를 통과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 해협은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와 함께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운송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말 그대로 전세계 무역에 큰 타격이 있기 때문에, 말라카 해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라카 해협의 중요성으로 인해 원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가 영해로 선포할 수 있는 지역이지만 해양법에 따라 국제수역으로 못박아버렸습니다.
Q. 로마시대 전성기와 멸망 원인은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철옹성 같은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을까? 멸망의 요인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어느 한 요인으로 진단하기는 어렵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제국의 쇠망 원인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한 제국의 천도, 기독교의 영향, 야만족의 침입, 지도자의 자질 저하” 등 크게 4가지로 지적한다. 반면에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로마의 멸망 요인을 부수적인 근인(近因)과 본질적 원인(遠因)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부수적인 근인으로 로마제국 말기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과 야만족의 침공을 제시하고 있다. 우발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기 180년에 갑자기 죽었고, 그를 계승한 콤모두스가 아버지의 원대한 게르만 정복 구도를 단행하지 않기로 했다. 2. 황제 발렌스가 서기 378년 아드리아노플전투를 앞두고, 어리석게도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격하여 전사했다. 3. 테오데시우스 황제가 서기 395년에 어린 상속자 둘만 남겨두고 죽음으로써 제국을 항구적으로 분열시켰다. 4. 야만족인 서고트족을 제압할 능력이 있었던 스틸리코가 서기 408년에 암살된 것과 같은 사건들이 하나로 작용하여 로마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그리고 4~5세기에 발생한 야만족들의 끊임없는 침공은 제국을 해체시킨 진정한 원인이었다. 좀 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원인들로 다음의 6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로마제국의 지리적 구조다. 서방은 동방에 비해 길고 취약한 국경 지대를 갖고 있었다. 야만족들은 로마가 강할 때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로마가 약해지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이어지는 2,400킬로미터의 국경선을 수도 없이 침공해 들어왔다. 반면에 동방은 이집트에 안전한 국경 지대를 두고 있었고, 페르시아와 가끔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문명국이었던지라 외교를 통해 관계를 조정할 수 있었다. 둘째, 인력 부족을 들 수 있다. 도시가 발달한 동방에 비해 인구가 훨씬 적으면서도 방어해야 할 영토는 더욱 넓었던 서방은 인력 부족 현상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서방은 갈수록 강력한 게르만족 군사 지도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그들이 서방 자체를 장악했다. 셋째, 경제적 취약성이다. 제국 초기에는 제국의 번영이 정복 전쟁들을 통한 전리품 유입이 있어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제국 후기에는 정복 전쟁으로 이익을 남길 만한 곳이 없었다. 야만족들은 가난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너무 강했다. 더욱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경제는 기본적으로 저생산성의 침체에 빠져들었다. 넷째, 고대 과학기술의 수준이 저급했다. 기술 혁신이 없이 노동력에만 의존하는 농업은 생산성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계나 동력 장치의 개발이 없이 노동력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낮은 생산성의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다섯째, 불안정하고 부패한 정치 문화다. 야만족의 침입이 빈번한 가운데서도 권력 찬탈을 위한 내전과 관리의 부패가 끊이지 않았다. 소중한 인력과 자원이 비생산적인 제위 쟁탈전에 소모되었고, 이러한 권력투쟁은 국경 지대를 방어해야 하는 국력을 약화시켰다.여섯째, 고대 사회의 귀족적 가치관이다. 고대의 귀족들은 기계를 만지거나 실질적인 직업을 하찮은 일로 여겼다. 생산을 위한 노동과 장사도 노예와 삯군처럼 천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가치를 두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을 좀 더 쉽게 만들거나 생산성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러한 귀족들의 가치관은 공화정시대나 제정의 초기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살아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정 말기가 되면서 귀족들과 지도자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사라지면서 악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권력이 황제의 수중에 집중되면서 많은 귀족들이 한때 그들의 경력에서 핵심 내용이었던 공직을 포기하곤 했다. 대신에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시골에 대저택을 짓고 사적인 군대를 양성하면서, 자신의 안녕만을 생각하고 국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귀족이 아닌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위해 제국의 군대나 민간 정부의 고위직에 올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사회 지도층의 인식이 능력 이상의 짐을 지고 허덕이던 생산력 있는 중간층과 하층민을 약화시키고 애국심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요인은 어느 한 요인이 주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얽히고설켜 복합적으로 국력을 약화시켰고, 결국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반면에 동로마는 서로마와 비교할 때 국방력이 강하고,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서로마가 사라진 뒤에도 약 1,000년간 더 지속되었다.
Q. 조선시대 세조의 정책과 그 효과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조는 먼저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세조는 관제 개편과 신하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했으며, 또한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에도 힘써서, 각 읍의 군사를 5위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 : 중간 규모의 군진)을 설치했다.1457년에는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법전 편찬과 서적 편찬 등의 사업을 벌였으며, 원구제(圜丘祭)를 실시하는 등의 문화 사업을 펼쳐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1459년 신숙주(申淑舟)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타이르게 했고, 경고를 듣지 않자 토포사를 보냈다. 또한, 이 해에 아버지 세종대왕과 장남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이듬해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신설하여 불경을 간행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圓覺經)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다. 또한 과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토록 하였다.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Q. 금관가야 왜 금관이라고 불리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락국(駕洛國)이라는 이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국명이며 삼국유사 이전에는 금관가야 혹은 구야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금관가야에 대해 중국 사서인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구야국(狗邪國) 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가야한국을 한자의 음차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이후에 가야는 가야(伽倻, 加耶, 伽耶),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등 여러 한자로 표기되었다. 금관가야가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변한 지역 연맹체의 중심국가였기 때문에 '가야'라는 말은 변한 지역 전체 또는 그 국가연맹체를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 때문에 금관가야에 이어 후기가야연맹을 이끌었던 반파국 역시 금관가야가 전기가야연맹을 이끌 때 쓰던 대가야란 이름을 연맹체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한편, 가야의 다른 이름인 가라는 외국을 뜻하는 일본어의 'から(가라)'로 전해지기도 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락국은 수나라(須那羅)'라고 쓰고 있는데 현대 우리말로는 '쇠나라'로 읽힌다. 이는 왜(倭)와의 교역에서 가야의 주요 수출품이 쇠(鐵), 즉 철기였기 때문이었임을 추정할 수 있으며, 금관가야란 이름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금관국(金官國)이란 이름 역시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