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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장경수 전문가
동화세상에듀코
Q.  러시아 대공국은 현재 러시아와 차이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키예프 대공국러시아는 슬라브족을 중심으로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러시아 역사는 류리크 왕조 시기, 로마노프 왕조 시기, 소비에트 시기, 현대 자본주의 러시아로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대 러시아 역사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키예프 대공국에서 시작한다. 서기 882년 루스족의 전설적인 지도자 올레그가 키예프를 점령하여 키예프와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 등에 공국을 세우면서 러시아의 고대 역사가 시작되었다.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동로마 정교회를 수용했다. 야로슬라프 통치기에 키릴 문자를 수용하고 발전시켜 오늘날 러시아어의 근간이 되게 했다. 키예프 대공국은 종교와 문자, 법전을 만들어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키예프 대공국은 1237년 칭기즈칸의 손자인 킵차크한국의 바투를 지도자로 한 몽골군의 침입을 당했으며 1240년 붕괴하였다. 몽골은 1240년 이후 200년 넘게 러시아 지역을 통치했다. 몽골의 러시아 통치 방식은 초기의 직접 통치에서 후기에 간접 통치로 바뀌었다. 간접 통치 형태는 러시아의 여러 지역에 있는 공국 중에서 힘 있는 공국에 조공 징수권을 위임하여 조공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이 대표적인 공국으로 부상했다.대공국의 정의일반적인 통치작위, 제후(Prince) 작위를 가진 군주가 통치하는 영지를 일컫는 말. Principality/Fürstentum의 번역어로 사용된다. 영어 Prince가 군주를 호칭하는 뜻으로 쓰였을 경우, 한국어로는 대공(大公)으로 번역하는 것이 표준국어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일반적인 어휘 사용이므로, 일단은 이러한 정체(政體)를 대공국으로 임의로 번역하였으나, 아래 번역 관련 항목이나 공국 문서에서도 나오듯 혼동의 여지가 있는 번역이다.러시아 공화국1990년 6월 12일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와 민족주의의 대두 등의 사회적 혼란으로 러시아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2000년에 보리스 옐친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강력한 러시아’를 내걸고 경제 개혁과 부패 척결을 내세움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2008년에 대통령 연임을 2회까지 허용한다는 규정에 따라 푸틴은 총리였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자신은 총리가 되었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헌법을 바꾸었다. 2012년에 다시 대통령이 된 푸틴은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다.
Q.  실존주의 철학을 잘 이해할수 있는 책은 어떤것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실존주의의 원류는 근대 시민사회가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19세기 중엽 이후의 대중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독한 예외자로서의 입장을 관철한 두 거성, 덴마크의 키르케고르와 독일의 니체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지성과 신앙의 차이에 괴로워하는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서도 주체성의 회복에 의해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는 실존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초엽에는 러시아의 셰스토프나 에스파냐의 우나무노 등 철학자나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작가 카프카(1883-1924) 등이 일상적인 삶의 저변에 숨겨져 있는 음울한 허무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본래적 자기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사상을 전개시켰다.실존철학을 하나의 독자적인 '철학'으로서 등장시킨 것은 제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의 심각한 사회적 위기감의 체험이었다. 이러한 체험의 철학적 반성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1919)이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실존철학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었다.
Q.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로 합병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러시아에 지배당한 크림반도와 크림 타타르인 1783년 예카테리나 2세가 통치하던 러시아제국은 크림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에 승리하고 크림을 러시아의 일부로 편입시켰습니다. 당시 크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크림 타타르인 (투르크계 민족으로 대부분 이슬람교도) 이였으며, 러시아제국에 합병된 이후 차별을 받기 시작, 소련시대에 들어가 그 정도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 결과로 1917년부터 33년까지 크림 타타르인의 반이 살해당하거나 기아로 인한 사망하는 일이 많았으며 1944년에는 나머지 크림타타르인 마저 소련에 의해 추방되어 중앙아시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인구의 극소수만이 크림타타르인인 상황입니다. 2. 선물로 우크라이나에 전달된 크림반도1954년 당시 소련 지도자 후르쇼프는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였던 우크라이나에게 크림반도를 이관시켰습니다 . 바로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에게 주는 같은 민족(동포)에의 선물이였던거죠. 당시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소비에트 연방국가에 속했기 때문에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의 관리하에 들어간다고 해도 큰 변화는 없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고 나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3. 소련붕괴 후 크림반도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1년 말,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독립하기 위해 찬반투표를 진행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였던 키예프에서는 96% 찬성, 하지만 크림반도에서는 55% 찬성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훨씬 낮았던 거죠. 그리고 소련에서 독립 후 1년이 되기도 전인 1992년 5월에 크림 주의회는 크림공화국을 세워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물론 러시아는 이를 지지했고요. 하지만 러시아가 체첸공화국의 독립문제해결을 우선시하며 크림독립 지지를 중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크림공화국의 독립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1998년에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며 마침내 크림자치공화국이 되었죠. 4. 친러시아파와 친서방(유럽)파로 분열소련 붕괴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사회주의에서 서서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로 변해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렵에 친화적인 친유럽파와 러시아에 친밀한 러시아파로 의견이 대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나라를 새로 만들어나갈지를 놓고 두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것이죠. 5. 무력충돌 그 와중에 201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였던 친러파 야누코비치는 EU(유럽연합)에 가입을 미루고 러시아와 조약을 맺으려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대한 친유럽파들이 대대적으로 항의하며 그 해 11월 유로마이단(직역하면 유럽광장)이라 불리는 시위운동이 시작되었죠. 이 시위는 지속적으로 일어나며 많은 참가자들이 친러파 아래에 있던 경찰이나 정부군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탄핵당하여 러시아로 망명하고 친유럽파에 의한 대통령이 탄생했죠. 6. 크림반도 합병 친유럽파에 의한 새로운 정부가 세워지자 친러파가 많이 거주하던 크림반도와 동우크라이나 지역에서도 항의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친러파에 의한 항의운동이였죠. 결국은 친러파와 친유럽파 쌍방의 무력 충돌이 2014년 시작되었습니다. 리틀그린맨이라 불리는 무장병사들이 크림반도의 정부기관을 점령한 것이죠. 그 결과로 크림 자치공화국의 수장은 새롭게 친러파 세르게이가 지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타고 크림자치공화국은 러시아의 일부가 되기로 하는 합의를 합니다. 그리고 2014년 3월 주민투표 후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여 러시아로 편입이 승인되었습니다. 크림자치공화국중선거관리위원회 (친러파 관리)에 의하면 투표의 찬성률은 96%였다고 발표했지만, 크림 타타르인의 대부분은 투표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당성을 인정하기는 어렵죠. 결과적으로는 이투표와 러시아의 무력 점령으로 인해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측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당한채 일방적으로 러시아 영토가 되었습니다.
Q.  고려시대 절에는 어째서 노비들이 존재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이래 조선 초기까지 사찰이 소유한 재산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당시의 사찰재산이란 말할 것도 없이 동산으로서의 노비와 부동산으로서의 전토가 그 중심이다. 국가에서 사원의 노비나 전답을 거두어 가기 이전의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다만 태종의 억불책에 의해 사찰의 재산이 공권력으로 확정될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태종 6년(1406)에 조정에서는 남겨 둘 사원의 수와 전답·노비를 정하였다. 곧 개성과 한양의 兩京에는 선종과 교종 계통의 각 1寺에 한해서 200結의 전답과 100명의 노비를 두어 100명의 승려가 살 수 있게 하고, 그 밖의 京內 각 절에는 전답 100결에 노비 50명을 두어 50명의 승려를 살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고 불교가 승려가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사유재산처럼 통용되는 노비도 소유의 개념이었다고 이해하면 더욱 쉬울 것입니다
Q.  세계가위바위보 협회는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계의 나라들이 다양한 언어와 종교를 믿고 있지만 가위바위보만큼 전 세계에 폭넓게 소통하는 문화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가위바위보(한국)’ ‘장켄폰(일본)’ ‘차이차이차이(중국)’ ‘카이트 타쉬 마카스(터키)’ ‘락 페이퍼 시저즈(영국)’ ‘로샹보(미국)’ ‘슈니크 슈나크 슈누크(독일)’등의 이름으로 외치며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습니다.무언가를 결정할 때, 서양의 동전 던지기처럼 단면적 결정이 아닌, 상대의 손과 내 손이 만났을 때의 의미는 ‘관계’이며 ‘대화’입니다. 승패의 결과에 갈등이 없는 최고의 지혜로운 갈등 해결법인 동시에 절대 심각하지 않고 웃음을 동반하며 즐거운 승복을 하게 됩니다.위의 한국가위바위보협회 소개글에서 의미를 추론해낼 수 있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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