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이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서울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고 육지 교통 뿐만 아니라 한강을 이용한 수로 교통이 편리하여 새로운 왕조의 도읍지가 되기에 안성맞춤이었지요.더구나 서울의 지형을 보면 안쪽으로는 동서남북에 각각 타락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백악산이 있어 서울을 감싸안고 있고, 이 내사산(內四山)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도성안으로 모여들어 서에서 동으로 흐르며 내수인 청계천을 이루고 있지요.또 바깥쪽에 역시 북한산, 아차산, 덕양산, 관악산이 외사산(外四山)을 이루어 자연적인 요새로서 서울을 지켜주고 있고, 그 사이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아주 큰 강인 한강이 있어요. 이렇게 서울은 산줄기와 물줄기가 절묘하게 어루러진 아름다운 곳이면서 사람살기에 적합하여 한 나라의 수도로서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던 것이지요.
Q. 세종대왕릉은 왜 여주에 있는것인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와 소헌왕후의 능은 원래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요?헌릉은 세종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가 묻힌 곳으로, 세종은 생전에 이 헌릉 근처에 수릉지를 정했습니다. 수릉이란 왕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둔 무덤을 뜻합니다. 그런데 수릉지를 정할 당시 풍수가 최양선이 이 터를 두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왕위 계승이 끊어지고 장자를 잃을 흉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끝까지 부모님 곁에 묻히기를 고집했고, 1450년에 결국 자신이 원하던 대로 헌릉 근처에 묻히게 됩니다. 문제는 세종이 죽고 2년 뒤부터 시작됐습니다. 풍수가가 예언한 대로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병에 걸려 사망한 것입니다. 이후 문종의 외아들 단종도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 역시 맏아들 의경세자를 잃고 맙니다. 결국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예종의 맏아들 인성대군마저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왕실의 대를 이을 장남들이 연이어 죽자, 결국 조정은 세종의 능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명당을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장지로 결정된 곳이 지금의 경기도 여주입니다. 훗날 지관들 사이에서는 이곳으로 세종의 능을 옮긴 덕분에 조선 왕조가 백년은 더 연장됐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Q. 이스라엘은 왜 주변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몇십 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종교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5월에는 서로 무차별 폭격을 하고 민간인을 죽이는 등 극단의 상황이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10일 후 가까스로 휴전 협상이 체결되었지만, 여전히 전쟁의 위험은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지속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은 왜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수천 년 전 유대인과 아랍인이 당시 이스라엘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점령으로 로마인과 유대인의 마찰이 많아지자, 로마제국은 유대인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아랍인을 중심으로 발전이 이뤄지고, 유대인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2000년을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이 시오니즘 운동을 통해 이스라엘로 돌아와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고, 약 40년 동안 45만 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원래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원주민(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때, 유대인의 힘이 필요했던 영국은 1917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역을 유대인 국가의 건설 지역으로 명명하는 벨푸어 선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1915년 오스만 제국 침략 시 아랍인에게 영국에 협조하면 아랍인 독립 국가를 만들어주는데 힘을 보태겠다는 맥마흔 선언을 이미 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아랍인은 토끼를 잡던 사냥개가 되었고, 영국에게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영국의 이중 계약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내전을 지켜보던 UN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영토를 6:4로 분할해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설립하라는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유대인은 만족했지만, 원래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아랍인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UN의 명으로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과 아랍인 국가인 팔레스타인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주변국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요르단 등은 모두 이슬람교 국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주변 이슬람교 국가 간의 중동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총 4번의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승리로 팔레스타인은 UN이 정한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현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만이 현재 팔레스타인 영토로 남아있습니다. 역사적인 맥락과 더불어 이스라엘 수도인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종교적 문제도 포함되어 있는 분쟁입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이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동예루살렘 역시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갈등을 겪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2021년에 이스라엘의 시위 강경 진압으로 갈등의 최정점을 찍었습니다. 이스라엘 내의 알 악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위가 있자, 이스라엘은 최루탄, 섬광탄 등을 던지며 강경 진압했고,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있는 하마스가 순차적으로 36개의 로켓을 이스라엘에 날렸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역시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을 가했습니다. 이때 팔레스타인에서는 민간인, 어린아이를 포함한 180명 이상이 사망하고 1,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역시 이스라엘의 천발 이상의 로켓을 쏘았고, 아이언돔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10명의 사망자와 2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는 평화를 간청하며, 무기의 떠들썩한 소란을 종식하고 평화로 가는 길을 닦는 데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숨졌고 그중에는 아이들도 있다. 이는 끔찍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들의 죽음은 미래를 건설하지 않고 파괴하기를 원한다는 신호고, 증오와 복수가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종식을 촉구했습니다. 한국의 시민단체 역시 “1948년 이스라엘 건국부터 시작된 팔레스타인 원주민 인종청소의 축소판”이라고 말하며 이번 분쟁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결국 주변 국가의 중재로 인해 현재는 휴전 상태에 도입했지만,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속에 국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을 것입니다. 블룸버그는 이번 휴전으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종교·민족적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만큼 앞으로 다시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남아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습니다.[출처] [별별기자단 김민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작성자 국가인권위원회
Q.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영국 왕정이 공인한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해적의 세계를 다루는 일본의 유명 만화 ‘원피스’를 보면 ‘칠무해’라는 집단이 등장한다. 각본에 따르면 ‘칠무해’는 세계 정부의 공인을 받은 7명의 해적들로서, 세계 정부의 앞잡이 역할을 해주는 대신에 해적질을 인정받은 자들을 일컫는다.이런 경우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가령 코에이가 만든 유명 게임 ‘대항해시대 II’에서 등장하는 하이레딘도 실제 역사 상 존재했던 해적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해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공인 해적은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아닐까 싶다. 드레이크는 유명한 항해사이자 해적으로, 스페인 함선을 주로 노략하여 스페인 선원들 사이에서는 ‘엘 드라코(용)’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드레이크와 같은 해적들을 적극 지원하여 스페인에 대한 사략(私掠)을 장려했고, 전쟁 시에는 이들을 정식 해군으로 기용하여 출전시켰다. 1587년,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허락을 받고 카디즈 항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함대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때 수십척의 상선을 불태우고 엄청난 전쟁물자를 약탈한 것 뿐만 아니라, 음식을 저장하는 모든 통을 불태웠는데, 이 계략이 이후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충분히 건조된 통이 없었기 때문에 습기가 남아있는 통에 음식을 보관하게 되었고 무적함대의 승무원들은 식중독과 전염병에 취약해진 것이다.”2. 해적이 만든 천하무적의 배, 레이스 빌트 갈레온16세기 영국의 악명높은 해적은 프란시스 드레이크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사촌형인 존 호킨스도 있었다. 그 둘은 젊은 시절 스페인의 감시망을 피해 신대륙에서 황금을 빼돌리는 불법사업을 벌이다 스페인 함대의 공격을 받고 겨우 살아남는다. 그때부터 그 둘은 각자의 길을 따라 스페인에 대한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드레이크는 훌륭한 전술가로, 호킨스는 기발한 전함 설계자로서.존 호킨스는 오랫동안 바다를 누비며 사략질을 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배를 개발하는데 착수한다(당시에는 처음으로 기하학에 입각한 설계도를 그려서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전함(갈레온선)들이 갖고 있던 가장 큰 단점이었던 불안정한 기동성과 느린 속도를 배의 선수와 선미의 크기와 높이를 줄이고 배를 전체적으로 길고 날렵하게 만들어 크게 개선하였다. 또한 포열 갑판을 늘려 장착할 수 있는 함포 수를 늘리고 화력을 극대화하였다.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으로 불리게 된 이 당대 최고의 전함은 결과적으로 “기존의 범선보다더 빠르고, 더 급격한 움직임이 가능하며, 화력도 강력했다.”당시 스페인의 거대 함선들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고 대량의 짐을 싣을 수 있도록 설계된 탓에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에 비해 속도도 느리고 기동성도 제한되었다. 반대로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은 전투용으로 특화된 디자인 때문에 화물을 싣는데 제한이 있었지만, 단거리 내에서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노략질하거나 교전하기에는 최적의 함선이었다. 따라서 1573년에서 1588년까지 영국은 총 18척의 레이스 빌트 갈레온선을 보유하게 되었고, 16척의 왕실 갈레온도 개조되어 그와 맞먹는 성능을 갖춘 배로 탈바꿈하였다.3. 가난했기 때문에 탄생한 승리의 주역, 주철대포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는 한가지 고민이있었다. 대포를 만들어야되는데 청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포는 일반적으로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만들기 쉽고, 녹슬지 않으며, 대포 발사 시 엄청난 압력에도 쉽게 파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동은 영국에서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수입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영국에서 나는 광물 중에서 대포 생산에 쓰일만한 건 양질의 철광석 뿐이었다. 헨리 8세는 무모한 도전에 운을 걸어보기로 한다.당시 철로 만든 대포는 청동 대포가 갖는 장점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철은 청동보다 녹는점이 두 배 이상 높았기 때문에 제작이 힘들었고, 쉽게 녹슬었으며, 대포 발사 시의 압력에 금방 부서져버렸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랄프 호지 등 프랑스의 유명한 제철 장인들을 불러모아 주철대포를 개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1543년 결국 첫번째 주철대포 제작에 성공한다.주철대포의 가장 큰 장점은 청동대포에 비해 값이 매우 적게 든다는 것이다. 1632년 영국해군의 기록에 따르면, 90톤의 청동대포를 제조하는데 1만 4,332파운드가 드는 반면 주철대포는 같은 양을 3,600파운드에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청동대포의 약 ¼ 가격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철대포는 값이 싼 만큼 보급도 신속히 이루어져 1588년에 이르러 영국 범선들은 이미 소형 혹은 중형 주철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스페인은 대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함선과 함선이 서로 측면을 맞대고 보병들이 올라서서 싸우는 백병전으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해전의 교전방식이기도 했다. 따라서 육군 강국이었던 스페인은 보병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대포의 위협을 과시하였다. 결국 스페인은 영국의 함포 사격으로 인해 백병전다운 백병전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허무한 패배를 맛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