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의1946년 미군정이 정권을 인도하기 위해 설립하였던 과도적 성격을 띤 입법기관.내용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미군정 당국은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 온건한 좌우파의 지도자들에게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알선하는 한편,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였다.1946년 6월 29일 군정장관 러치(Lerche,A.L.)는 조선 인민이 요구하는 법령을 조선 인민의 손으로 제정하는 입법기관의 창설을 미군사령관 하지(Hodge,J.R.)에게 건의하여 그 해 7월 9일 하지의 동의를 얻어 8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을 발표하게 하였다. 입법의원은 모스크바삼상회의협정에 의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당시 정황은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고 국내 정국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때라, 군정연장설·통일정부지연설 등을 이유로 입법의원 창설에 대한 비난이 컸다. 이에 하지와 러치는 입법의원이 행정권 이양의 한 단계이며 인민이 정부 운영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한 표현으로서, 남조선 단일정부 수립이나 기타 아무런 다른 목적도 없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입법의원은 1946년 10월 21일부터 31일에 걸쳐 민선의원 45명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관선의원 45명은 하지가 임명하였다. 그 해 11월 4일 개원이 예정되었으나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선거의 부정과 친일인사의 등장 등이 지적되면서 서울과 강원도의 입법의원 선거가 무효로 처리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재선거를 실시하여 개원이 1개월 연기되었다.정식 개원일인 12월 12일을 하루 앞둔 11일의 예비회담에서 한민당 출신 의원들은 서울시와 강원도의 재선거에 불만을 표시하고 등원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법령에 규정한 회의구성의 정족수(전체의원의 4분의 3)가 미달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하지는 전체의원의 2분의 1로써 정족수를 구성하는 수정법안을 공포하여 이날 예비회의를 성립시켰고, 참석의원 53명 중 49표의 절대다수로 김규식이 의장에 당선되었으며, 1946년 12월 12일 57명의 의원이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개원식을 거행하였다.이로써 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대의정치기관이 탄생되었으나 이곳에서 제정한 법령은 군정장관의 동의를 얻어야 그 효력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국회와는 그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행정부·사법부와 더불어 남조선과도정부로 하여금 삼권분립의 형태를 갖추게 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네이버 지식백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南朝鮮過渡立法議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Q. 신한 청년단은 어떤 조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은 1918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 단원들을 주축으로 조직된 한국의 독립 운동 단체로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이다. 당수는 여운형이며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이었으며, 그 밖에도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 등도 관여하였다.당의 강령은 '대한 독립·사회 개량·세계 대동' 등 세 가지였다.1918년 12월 독립 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도쿄, 연해주,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신한청년당은 일본·만주·연해주·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 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며, 1918년 12월에 부산에 파견된 장덕수는 백산상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 참석 경비 3000원을 모금하였다. 일본 도쿄에 파견된 신한청년당 인사들은 일본 동경 유학생들과 접촉하였다. 이러한 신한 청년당의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한국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3·1 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이 되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뒷날 1919년 4월 10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을 이루었다.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후에 독립 운동가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1923년에 해체하게 된다.
Q. 조선후기에 노론사관은 어떤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이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는데, 그 중 노론이 경종 시기 잠깐을 제외하면, 조선 말기까지 조선을 장악하였으며 국가 발전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는 주장이다.노론 음모론에 따르면, 노론은 우선 사도세자를 악의적으로 모함하여 영조가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를 죽이게 만들도록 이끌었다. 임오화변을 계기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었는데, 벽파가 개혁군주 정조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즉,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것. 이후 노론 벽파는 지속적으로 권력을 잡고 세도정치를 펼치며 조선을 썩게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환빠처럼 근현대사에서도 노론 세력의 음모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니 그냥 노론 음모론자들 중에 환빠를 겸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다.노론 음모론자들은 대한민국이 독립하자 노론 세력이 영남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우파 세력이 되어 지속적으로 진보를 방해해 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른바 '영남 노론'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즉 영남의 보수 우파 문중들이 자기네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고 노론 음모론은 설명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노론 사관의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례로 지목한다. 의 십만 양병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서인들이 양병설 등 이이의 개혁/경장 주장들을 언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 착오했다고 보아야 한다.노론 음모론자들은 기존 사학계와 적대적인 환빠와 결합하여 주류 사학 = 노론사관 = 식민사관이라고 도식화하고, 대한민국 우파를 조선시대 노론과 친일파에 연결시킨다. 때로는 여기에서 더 발전해 정파적인 주장으로 결론 짓는다. 즉 '영남 노론'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경상도에 기반을 둔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정권을 세워, 권력을 유지하며 다른 지방과 진보 세력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 '노론 사관'이란 게 역사학계 내부의 사관이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 정파적인 이유로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문 영역에서 노론 사관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적 이미지가 좋은 군주 정조를 자신들에 대입하고, 반대세력은 악의 세력으로 대입해서 노골적으로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에 좌파 진영 지지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음모론이고, 그걸 마치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기에 현재도 진실이라고 믿는 지지자들로 인해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