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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7

최무선의 업적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무선은 어떠한 업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함께 그는 어떠한 일생을 살았고,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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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기의 관료. 왜구가 창궐하자 화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중국 상인에게서 염초 제조법을 배워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으며 1380년 진포에서 왜선을 섬멸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본관은 영주(永州)이며, 1325년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았으며 병법(兵法)을 즐겼다고 한다.

    14세기에 고려는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오랜 전란으로 생활이 피폐해지면서 규슈[九州]와 쓰시마[對馬島] 등의 주민들은 고려와 중국 해안 지역에 대한 약탈에 나섰는데, 14세기 후반에는 그 규모도 커졌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컸고, 해안 지역에 살던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하여 평야 지대의 농토가 황무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세 운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가 재정에도 타격이 컸다.

    최무선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화약(火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중국 강남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서 정보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이원(李元)이라는 상인에게서 화약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염초(焰硝) 제조법을 배워 화약 개발에 성공했다. 그 뒤 최무선은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해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都監) 설치를 이끌어냈으며, 제조(提調)로 임명되어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다양한 화기를 개발했다. 그리고 전함(戰艦)에 관해서도 연구해 군사와 장비를 많이 실을 수 있는 누선(樓船)도 개발했다.

    이처럼 화약과 화기 제작을 주도한 최무선은 1380년(우왕 6) 왜구가 전라도 해안 지역을 침략해오자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참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화기를 사용해 진포(鎭浦)에서 왜구의 선박 500여척을 격파했다. 1383년(우왕 9)에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389년(창왕 2)에는 박위(朴葳)와 함께 쓰시마[對馬島] 정벌에도 참여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를 사용하면서 고려는 왜구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화기를 해안 지역에 배치하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체제도 정비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그의 벼슬은 문하부사(門下府事)에 이르렀으며, 조선 건국 이후에는 검교참찬(檢校參贊)으로 임명되었다. 최무선은 1395년(태조 4) 5월 8일(음력 4월 19일)에 죽었으며, 1401년(태종 1)에 의정부 우정승과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조선 왕조에서는 화약을 개발해 왜국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최무선의 업적을 목화씨를 가져와 서민생활의 개선에 기여한 문익점(文益漸)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했다. 최무선은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고, 문익점은 백성의 이(利)를 일으켜 백성의 삶에 커다란 혜택을 가져다준 인물들로 숭상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1401년(태종 1) 최무선과 문익점의 아들에게 특별히 벼슬을 내렸으며, 세조는 1456년(세조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두 사람의 관향에 사당을 세워 업적을 기리게 했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법 등을 기록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과 《화포법(火砲法)》을 저술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래서 아들인 최해산(崔海山)과 손자인 최공손(崔功孫), 증손인 최식(崔湜) 등도 그에게서 화기 제조법을 이어받아 모두 벼슬을 하며 조선 전기 군기(軍器) 개발을 주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87년(성종 18)에 최식이 증조부인 최무선의 책과 그림인 《화포법》과 〈용화포섬적도(用火砲殲賊圖)〉를 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최무선의 저술은 기록에만 남아 있고,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무선 [崔茂宣]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출처: 네이버사전 두산백과 최무선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발명가. 영천에서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고려에는 왜구가 창궐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왜구를 물리칠 화기를 제조하기 위해 화약제조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원나라 이원에게서 배운 화약제조법(염초제조술)을 기반으로 1377년(우왕 3) 화통도감을 설치케 하여 화약을 만들었다.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포·석포·화포·신포·화통·화전·철령전 등 각종 화기를 제조하며 누선이라는 전함 건조에도 힘썼다.

    1380년 왜구가 전라도에 대거 침입했을 때 최무선은 부원수로 참전하여 진포에서 화포·화통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왜선 500여척을 전멸시켜 영성군에 봉해졌다. 1383년 왜구는 120척의 선단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에 재침입하였다. 이 해전에서도 최무선이 참전하여 선봉에 선 적선 20척 중 17척을 화포로 궤멸시켰다. 2번의 해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고려는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이로서 왜구의 침공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389년(창왕 1) 화통도감이 철폐되자 최무선은 집에서 《화약수련법》 《화포법》을 저술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태종은 최무선의 공을 인정하여 정헌대부·검교문하부참찬사 겸 군기시판사 벼슬을 하사했다. 의정부 우정승에 추증, 영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아들 최해산은 아버지의 비법을 전수받아 화기를 개발했으며 수레에 화기를 장착한 병기인 화차를 개발하였다. 특히 1409년(태종 9)에 육상화차를 개발하여 경복궁 후원인 해온정에서 발사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촌에서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극심한 시기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최무선은 일찍부터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화약 제조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을 수소문하여 만났으며, 꾸준히 그에게 접근하여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 한편 고려사에서는 중국인이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 이원이며, 최무선과 그와 같은 마을에 살아 화약 제조법을 배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한 후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관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건의는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조정에 받아들여져 화약국을 설치하고 화약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화약 병기는, 1104년(숙종 9년) 여진 정벌을 위해 11개 특수 부대로 설치한 별무반 중에 발화(發火)라는 부대가 존재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에 이미 전래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약과 화기를 독자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한 시기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이 설치된 1377년(우왕 3년) 이후입니다. 화약 제조에 성공함으로써 화통도감을 맡게 된 최무선은 곧 화약을 넣어서 발사할 수 있는 화포 제작에 착수하여 다양한 화포를 개발하였습니다. 이렇게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과 화포는 고려 후기 왜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선책의 하나였습니다. 고려군은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로 1380년(우왕 6년)의 진포 싸움과 1383년(우왕 9년)의 진도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물려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