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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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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는 어떻게 승리했나요?

몽케칸 사후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간 계승전쟁이 발생했고 대다수의 황금씨족이 지지를 보낸 아릭부케가 정통성이 약한 쿠빌라이에게 지게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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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59년 묑케가 남송정벌중에 사망하자 몽골제국은 또다시 대칸위 승계문제를 둘러싼 승계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승계분쟁의 주역은 묑케의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뵈게였다. 물론, 묑케의 또다른 동생이었던 훌레구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1256년이래 페르시아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해 왔고 그 영지는 제국의 본영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를 이끌고 승계분쟁에 참여하기는 불가능했다.


    묑케가 사망하자 북중국 총독이었던 쿠빌라이는 남송정벌을 중단하고 1260년 그의 본거지인 개평(開平)으로 돌아가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 쿠릴타이를 개최해서 자신이 대칸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쿠빌라이에 의한 이러한 쿠릴타이의 개최는 칭기스한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는데 전통적으로 대칸을 선정하는 쿠릴타이는 몽골리아에서 개최되어야 했고 칭기스한에 의해 분봉된 4개 울루스의 대표들이 참가해야만 했다.

    한편, 묑케가 사망하자 몽골인 본고장의 총독으로 카라코룸의 행정을 담당해오던 아릭뵈게도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쿠릴타이를 개최해 대칸임을 선언하는데 이에 묑케의 황후와 차가타이가 및 외게데이가계의 왕자들이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외게데이가의 대표인물이었던 하이두까지 동조하게 되었다. 쿠빌라이와 아릭뵈게간의 전쟁은 1262년 본격화되어 약3년여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1264년 쿠빌라이가 카라코룸을 점령하고 아릭 뵈게가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아릭 뵈게의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몽골제국의 명실상부한 대칸위에 오른 쿠빌라이는 국호를 칭기스한이래 계속 쓰여오던 ‘대몽골’(大蒙古:Yekke Ulus Mongol)에서 중국식인 원(元)으로 바꾸었고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정했으며 천도를 단행해서 제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대도(大都:오늘날의 북경)로 옮김으로써 유목사회와 농경사회를 융합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대칸으로의 등극과 영농정착지역인 대도로의 천도는 하이두를 대표로 하는 외게데이가의 극심한 반발을 샀고 이후 순수유목민전통에 입각한 칭기스한가문의 제국 재건을 위한 하이두가 중심이 된 복위전쟁(復位戰爭)의 계기가 되었고 몽골제국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칭기스한이래 몽골민족의 숙원이었던 중국통일을 위해 묑케사후 중단되었던 본격적인 남송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1268년 몽골군의 남송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었는데 몽골의 남송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장군은 바얀(Bayan)과 우리양카타이의 아들이었던 아추(A-chu)였다. 몽골군은 양자강 중류의 요충이었던 양양(襄陽)을 포위하고 1274년까지 약 6년간에 걸친 집요한 공격 끝에 남송의 주방어선을 무너뜨렸다. 남송은 가사도(賈似道)를 중심으로 강력히 대항했지만 1275년 정가주(丁家州)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바얀장군 휘하의 몽골군은 약100만의 남송군을 궤멸시키고 말았다.

    이 전투는 몽골군이 송의 마지막 보루였던 수군(水軍)을 격파시킬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한 전투로서 몽골의 중국정복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1276년 송의 수도였던 항주가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고 송의 마지막 유아천자인 공종(恭宗)이 몽골조정으로 압송됨으로써 송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송의 승상(丞相) 진의중(陳宜中)과 통장(統將) 장세걸(張世傑)등은 제병(帝昺)을 새로운 군주로 옹립해서 복주(福州)와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항몽투쟁을 전개했지만 1279년 4월 몽골군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송군의 저항은 종지부를 찍게되었고 중국의 전역이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되어 마침내 몽골는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북방민족이 전중국을 지배하는 정복왕조를 건설하였다.

    중국전체를 지배하는 최초의 정복왕조 건설에 성공한 쿠빌라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제국내의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즉, 당시 몽골제국 내에는 다양한 피정복민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신분질서를 엄격히 하여 각 민족간의 차별을 둠으로써 몽골인의 지배를 강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몽골제국내의 여러 민족의 지위를 제국건설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4등급으로 규정하였는데 몽골인은 국인(國人)이라하여 제1등급으로 분류했다.


    제2등급은 색목인(色目人)이 해당되었는데 이들은 서역인이라고도 칭해지는 서방계의 잡다한 민족을 총칭하는 것으로 칭기스한의 서방원정시 몽골군에 항복하고 협력한 나이만, 위구르, 탕구트인들을 비롯해서 티벳, 페르시아, 아랍, 동부 유럽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뛰어난 행정기술과 재능을 발휘해서 몽골제국에 봉사했는데 주로 조세징수, 재정관리, 무역과 외교, 정복지 통치 등에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이들은 오르탁(Ortaq:斡脫)이라는 상인조합을 구성하여 황실 및 귀족들의 영리사업을 담당하여 고리대금업, 상업, 해외무역 등에 종사하였고 위탁자인 몽골인들에게 거대한 부를 제공해 주면서 그들도 부와 권세를 함께 누렸다. 이들은 각기 고유의 언어, 문자, 종교, 풍속을 유지할 자유를 가지며 집권층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제3등급에는 화북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과 고려인들이 포함되었다. 마지막 제4등급에는 몽골의 침입 때 끝까지 저항했던 남송의 강남인들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지배민으로 전락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선진정착사회라 할 수 있는 중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실무행정에 밝은 한인들을 몽골의 통치기구 안에 흡수하여 이들에게 조세면제의 특권을 주면서 중급, 하급관리 또는 상급서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외의 지역에 대한 쿠빌라이의 정복전쟁을 살펴보면 1270년 쿠빌라이는 고려(高麗)를 완전정복하여 속국화시켰고 고려를 발진기지로 해서 2차에 걸친 일본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다.


    몽골군의 제1차 일본원정은 1274년 감행되어 몽골군은 대마도(對馬島:Tsushima)에 상륙했지만 일본수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후 우수한 함선과 더불어 약 4만 5천명에 달하는 정규군을 파송하여 1281년 몽골의 제2차 일본원정이 시작되어 몽골군 함선들은 2대로 나뉘어 구주(九州:Kyushu)해안에 정박했다

    몽골군과 일본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어 가열될 때 태풍이 내습하여 몽골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버려둔 채 철수해야만 했다. 이후 태풍이 일본을 구했다고 일본에서는 이 태풍을 신풍(神風:Kamikaze)이라 불리워졌다.


    또한, 쿠빌라이는 동남아시아지역 공략에 나서 1287년에는 미얀마를 완전정복했고 오늘날의 베트남지역에 있던 안남국(Annam:북베트남)과 참파국(Champa:남베트남) 그리고 오늘날의 크메르와 라오스 및 타이영토의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크메르제국, 수마트라(Sumatra), 자바(Java)를 공략했다.


    특히, 몽골의 베트남지역 공략은 쩐 흥 다오(Tran Hung Dao)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민들의 강렬한 항거로 큰 고전을 치르다가 종국에 몽골군은 동남아시아지역에서 철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의 정복전쟁이외에도 쿠빌라이는 이미 세계제국화된 몽골제국을 경영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수립했는데 즉, 그는 전통 중국왕조의 치국책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유교국가의 모델을 몽골제국에도 적용시켰다.

    쿠빌라이가 새롭게 채택한 행정제도는 당, 금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는데 대칸의 절대적인 권한을 보장하는 내용들이 새로이 부각되었는데 그 주요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 외게데이 재위기에 설치된 중서성(中書省)의 기능이 확대되어 쿠빌라이 치하에서는 정부의 중추가 되는 관서로서 다른 모든 행정부처를 통괄하게 되었고 최고 책임자로는 황태자가 임명되었다.


    둘째, 새롭게 추밀원(樞密院)을 설치해서 황제의 왕명, 출납을 담당했고 중국, 몽골, 중앙아시아지역의 군사관계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셋째, 어사대(御史臺)를 설치해서 대칸과 중앙관서의 장들이 유교의 원칙에 입각해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지의 여부를 감시했으며 이밖에도 지방행정부의 공개감찰 및 하위관리에 대한 비밀감찰업무를 수행했다.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중국이 고래로부터 농업국가였다는 점에서 농업진흥책을 채택해서 경제부흥정책을 추진해서 그 결과 중국역사상 최초로 중앙행정부기구내에 농업의 증진을 위한 특별관서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사농사(大司農司)이다. 또한, 그는 농업의 중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농상집요(農桑輯要)를 편찬하게 했으며 과거 농업생산물이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던 지역들이 적극적으로 개발되었다.

    이처럼 그는 농업의 발전을 꾀하는 한편 몽골제국내의 각 지역간의 교역활동 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교역활동도 적극 권장하여 제국의 재정수입을 증대시켰는데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남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 따르면 쿠빌라이가 추진한 경제정책의 성공으로 중국내의 여러 도시들이 크게 번성했다고 전한다.


    한편, 쿠빌라이는 역대 중국황제와는 달리 모든 종교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취했는데 그 결과 중국역사상 독특한 종교행위를 전담하는 일련의 부서들이 설치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는 선정원(宣政院)이었다. 그는 티벳승 팍스파(Phags-pa:八思巴) 라마를 선정원의 책임자로 임명해서 몽골제국내의 모든 불교관계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쿠빌라이는 그가 총애한 팍스파 라마를 이용해서 티벳과 같은 광대한 나라를 손쉽게 지배할 수 있었으며 그로 하여금 팍스파문자를 만들게 해서 이 문자는 원조의 공식문자로 채택되기도 했다.


    또한, 쿠빌라이는 새로운 역서(曆書:달력)를 채택했다. 원래, 몽골제국 초기에는 금의 역서를 이용했으나 후에 야율초재가 변경한 것으로 대치하였고 다시 페르시아인 천문학자 자말 알딘(Jamal al-Din)이 편찬한 역서를 이용했다. 그러나, 이상 3가지 모두 부적당하고 사용이 불편해서 오랜 연구 끝에 새로운 역서인 수시력(授時曆)이 편찬되어 공식역서로 채택되었다.


    아무튼, 몽골세계제국의 대칸으로서 중국의 황제로서 쿠빌라이의 재위기는 원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기간이었다. 그의 선정으로 과거 수십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되었던 중국이 또다시 번성하는 새로운 국가로 출현하게 되었다.

    출처 : 투르크 인문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