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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09.25

강화도 조약의 배경이 된 운요호 사건은 무엇이며, 어떤 경위로 발생하였나요?

강화도 조약의 배경이 된 운요호 사건은 무엇이며, 어떤 경위로 발생하였나요?

사건의 배경과 주요 인물들, 그리고 사건의 결과가 일본의 제국주의 확장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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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2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부근을 불법 침입한 사건입니다. 조선정부는 1874년 청나라로부터 일본이 장차 타이완을 침략한 것과 같이 한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자문을 받고, 대원군의 심복으로 대일교섭을 담당한 동래부사 정현덕 등을 처벌하고 양국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우호적인 태도를 일본 측에 전달했습니다. 한편 교섭재개를 위하여 이미 부산에 파견되었던 모리야마는 이러한 조선의 우호적 태도가 대원군의 실각에 수반한 정국의 혼란과 정부의 약화에서 유래했다고 파악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조선에 대하여 약간의 힘과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외무성에 보고했다고 1875년 부산에 거듭 파견되어, 4월 15일 강경한 대한포함외교를 주장하는 건의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모리야마의 강경책은 일본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군함파견 결정에 의해 운요호와 제이정묘호가 각각 5월 25일, 6월 12일에 부산에 입항했으며 그들은 조선의 항의를 무시하고 연안을 탐측하면서 무력적 포함시위를 단행했고, 6월 14일에는 부산훈도 현석운 등 조선관리가 관람차 승선하자 불시에 발포연습을 감행함으로써 일본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을 강행할 것임을 과시했습니다. 이후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던 운요호는 9월 20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에 정박했고, 함장 이노우에 가오루이하 수십 명의 해병은 보트에 나누어 타고 초지진으로 침입했습니다.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침입해오는 일본 보트에 포격을 가했고, 이에 이노우에는 운요호로 철수하여 즉각 초지진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습니다. 이어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에 포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을 벌여 일대 격전이 벌어졌는데, 조선수비병은 근대식 무기를 휴대한 일본군을 대적 할 수 없어서 첨사 이민덕 이하 400~500명이 패주했습니다. 일본군은 무기를 약탈하고 영종진에 대해 방화·살륙·약탈을 자행한 뒤 나가사키로 돌아갔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 군함 운요호가 1875년 9월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하기 위해 왔다가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해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 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해 조선수군을 공격해 인적, 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입니다.

    19세기 국제사회는 제국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대로 강대국이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압박해 개항을 유도하거나 침략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포함외교에 바로 굴복하고 개항했고 그 후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후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양이정책으로 실패,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며 개국의 분위기가 일어났으며 일본은 정한론의 일환으로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포함외교를 시도하게 됩니다.

    이에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를 부산에 침투, 부산훈도 현석운이 부산의 왜관을 찾아가 군함을 침투시킨 이유를 묻자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는 조선과의 수교 교섭이 지연되는 이유를 일본의 이사관에게 물으러 왔다고 거짓으로 설명하고 현석운을 군함에 승선시켜 함포사격 훈련을 구경시키는 등 군함의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운요호는 조선 해안을 탐측하고 연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구실을 대며 동해안을 순항하고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앞 난지도에 도착,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는 일본군 수십명을 데리고 담수 보급 명목으로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하는데 이때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 수병은 예고도 없이 침투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했고 이에 일본군은 모함으로 돌아가 함포로서 조선에 보복 폭격을 하게 됩니다.

    영종진에 상륙해 조선수군과 격전을 벌여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무기도 다량 탈취, 주민에 대한 방화, 살육을 하고 퇴각합니다.

    그 후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나타나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통상 할 것을 강요, 이듬해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을 체결, 조선은 일본에 개항하게 되었습니다.

    국력이 약한 결과 불법침입자에 대한 정당한 방어적 공격이었으나 일본은 그 책임을 조선에 묻고 강제로 수교한 것으로 이는 일본 제국주의 대륙침략의 단초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5년 5월 운요호를 포함한 2척의 군선(軍船)을 부산으로 파견한다. 부산에서의 도발과 무력 시위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같은해 9월 운요호는 단독으로 강화도에 무단 침입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