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학문

역사

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

연산군이 치세 마지막에 갑자기 폭주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산군은 재위하고서 10년간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갔는데 재위 10년을 기점으로 엄청난 잔혹성을 보이면서 폭군이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3개의 답변이 있어요!
전문가 답변 평가답변의 별점을 선택하여 평가를 해주세요. 전문가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이 폭군이 된 이유는 조선의 4대 사화중 무오사화, 갑자사화 2개의 영향이 큽니다. (사화는 정치적 전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첫 전쟁이고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엄마인 폐비 윤씨를 죽이는데 가담했던 모든 인간들을 처참하게 죽이는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금삼의 피를 보고 확신하게 되었고 성종실록을 보고 어머니인 폐비윤씨의 죽음이 모함에 의한 것임을 알고 사림파들과 후궁들에 대한 죽임의 굿판을 벌이게 됩니다. 무오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 사림파들이 죽임을 당하는 등 일대변혁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박원종 등에 의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19세 12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섭정은 받지 않았다.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였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극에 달해있던 유자광,이극돈의 상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사림세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연산군에게 사림세력을 제거 할절호의 기회가 된것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집요한 간언으로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일부 훈신세력까지 제거하게 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여 들였으며 심지어는 어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등 폐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 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 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림세력 뿐 만아니라 연산군의 궁중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이었다.


    연산군은 대신들 뿐 만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들이받아 절명캐 하는가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연산군이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등의 언판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남김없이 처리해 버렸다.


    성균관과 원각사를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홍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고,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 시켰는데 두 달뒤인 1506년 11월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 을마감했다. 능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으며 ‘연산군지묘’라는 비석이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