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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4.03.10

우리나라 서울에도 전차가 다녔었다는데, 언제 왜 없어지게 됐나요?

우리나라 서울에도 일종의 트램 같은 전차가 다녔었다는데요.

트램은 지금도 유럽 많은 국가에서 훌륭한 교통수단으로 쓰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없어지게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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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울 전차의 역사가 궁금한 것 같습니다.

    서울전차 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 시내에서 운행하던 노면전차를 말합니다.

    전차 사업이 서울시로 이관된 직후인 1966년 6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세종로 지하도 공사로 인해 효자동-남대문과 신문로-화신백화점 간의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중 세종로-효자동 구간은 도로 정비로 인해 궤도와 침목을 아스팔트로 복개하면서 더 이상 운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1967년 10월 5일자로 전차요금 100% 인상이 단행하였으나, 일단 나머지 구간의 운행은 여전히 유지되었습니다. 이후 1967년 9월에 발표된 〈전차 현대화 5개년계획〉에서 각 노선을 외곽으로 이설한다는 계획이 나왔으나, 이후 1968년 4월 16일에 발표되었을땐 외곽 이설에 대해서는 얼버무렸으며, 다만 철거 계획만이 크게 강조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영화와 폐지 추진 과정에서 전차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또는 서울시 산하의 각 사업소 등지로 전보되었으며, 그 외에 택시회사 등으로 재취업이 이루어져 고용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울전차는 대한제국의 전기 도입 사업의 부대사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898년 2월 19일 -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대한제국으로부터 전기사업권을 획득하여 한성전기회사 설립되었고, 1898년 12월 25일, 서대문~청량리 간 단선 신설되고 최초로 운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개통 당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고, 또한, 성내 주민들 역시도 매우 반응이 좋아서 개통 당일 운행에 지장이 발생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생업을 잊고 전차만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방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많아 파산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답니다.

    이랬던 서울 전차는 세월이 흘러 점차 노후화 되어갔고, 경영상황이 점차 악화되어갔고, 결국 1968년 11월 30일 서울전차의 전 노선이 자정을 기해 운행 중지하게 되었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에 전차가 처음 운행되었던 시기는 1899년 5월 20일부터 1968년 11월 30일까지입니다.

    1966년 서울시로 전차 운영이 이관된 이후 1966년 6월 세종로 지하도 공사로 8월 27일까지 전차 운영이 중단되었으며, 1967년 9월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서 외고가으로 이설 계획을 세웠으며, 이설은 되지 않고 철거 계획만 강조됩니다. 그리고 1968년 11월 30일 전 노선이 운행 중지된 이후 1974년 수도권 전철이 개통될 때까지 대중교통은 버스가 맡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면전차가 자동차와 도로를 공유하다보니 도로 중심정책을 펴던 당시, 교통체증을 유발해 폐지하게 됐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시민의 이동권 침해라고 주장하기 이르지만 결국 지난 1968년을 기점으로 서울전차는 운행을 중단,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울의 노면전차는 1899년 처음 들어와 70여 년동안 사용된후 시설 노후화와 부속품 부족으로

    1968년 11월 30일 0시에 운행을 종료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차량의 노후화가 점차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전차 요금이 동결되었고, 전차 사업의 적자가 엄청났다. 시설 또한 응급 복구와 수리에만 치중한 데다, 신차 도입이 거의 없던 수준이었다. 차량의 경우, 213대 중 196대가 내구연한인 20년을 초과한 상태였다. 선로의 내구연한 또한 20년이었으나, 평균 사용연수가 38년이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381호도 196대 중 하나였다. 여기다가 인건비와 도로점용료의 증가로 인해, 적자는 더욱 커졌고, 자동차 등의 승용차가 보급률이 큰 폭으로 증가되면서, 노면전차는 느린 속도와 잦은 고장을 유발해, 도로 헬게이트를 유발한다고 까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적자를 견디다 못한, 경성전기는 전차 사업의 서울시 인수를 추진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민간 매각을 추진했으나, 역시 매수할 사람이 없어서 실패했으며 1961년에는 경성전기 등 3사가 합병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력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다시 말해, 경성전기 등의 3사가 한전의 전신이 되는 셈이다.


    아무튼 자동차의 보급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아직은 자동차가 소수의 부유층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시절이었고 버스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의 인구가 매년 폭증하여 증설한다해도 출퇴근시간때마다 지옥도를 거뜬히 찍었던 상황인지라[55] 별다른 대체교통수단이 없어서 시민의 이동권 문제가 번번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 점점 전차를 폐지하는 수순을 밟자 철거 방안이 가시화되어, 결국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지하철 건설을 통한 교통난 해소 방안을 내놓으면서 전차 철거를 못박아버렸다. 불도저 시장, 돌격 시장으로 불리며 서울시 전체를 공사판으로 헤집어놓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말만 해놓고, 언제 할지 실질적 준비는 전혀 없어서 전차 노조와 시민들에게 신나게 까였다 어쨌든 1966년 6월 1일부로 전차 사업이 한국전력에서 서울시로 이관되었고, 9월 30일에는 세종로에 지하도를 착공함과 동시에 남대문 ~ 효자동, 서대문 ~ 종로네거리 간의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공사가 끝난 뒤 남대문 ~ 효자동 구간은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문을 위한 도로 정비로 인해, 콘크리트를 궤도에 덧씌워버리는 바람에 이 구간이 폐선된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967년 9월에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서 각 노선을 외곽으로 이설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1967년 10월 5일에는 전차 요금을 100% 인상을 단행하였고, 나머지 구간은 계속 운행되었다. 그런데, 1968년 4월 16일에 발표되었을 땐, 외곽 이설에 대한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에 관해선 대충 얼버무리고, 철거 계획 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사실상 계획을 엎어버린 셈. 시영화와 폐지 추진 과정에서 전차 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또는 서울시 산하의 각 사업소 등지로 옮겨갔으며, 그 외에는 택시 회사 등으로 재취업이 이루어져 고용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고 말이 일단락이지, 해고나 가깝다.


    그리고, 1968년 11월 30일 자정을 기하여 서울시에는 더 이상 전차가 달리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