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이유를 쉽게 설명해 주실수 있나요?
얼마전 창경궁을 구경하러 갔더니 창경궁내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뒤주가 놓여있던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사도세자는 영조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로 어릴적 똑똑하여 영조가 아들을 너무 예뻐했다고 하던데 뒤주에 가둬 죽여버린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단 영조가 사도세자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워했다기보다는 크게 3가지 요인이 그 두 부자간의 갈등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
2. 두 사람의 성장환경 차이
3. 정치적 환경의 차이
로 볼 수 있습니다.
영조의 경우 체격이 가늘고 호리호리한 체격과 주요 관심사는 학문과 글 공부였고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비천한 출신과 경종 독살설 등 재위때에도 이인좌의 난과 당파싸움으로 꽤 불안한 정치 환경에서 탕평책을 펼쳐 왕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사도세자는 건장한 체격과 학문보다는 무예를 더 좋아했다고 전해지며 또한 자신외에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인데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조정이 안정화되어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복잡한 당파싸움을 조율하고 왕권을 주도할 수 있기를 바랬지만 영조 자신이 원하던 군주의 상이 사도세자에게는 보이지 않았고 또 영조가 당시 수명으로는 꽤 늦은 나이에 얻은 후계자인지라 너무 기대를 했던 나머지 사도세자를 엄격하고 강하게 키우기 위해 칭찬 대신 자주 훈육과 질타를 하게 되었지만 사도세자는 영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고 영조의 압박도 너무나도 지나친 나머지 사도세자는 점점 영조를 두려워하고 정신적인 문제까지 생겨 망가져버린겁니다.
하지만 영조로서는 사도세자를 이렇게 강하게 질타하였지만 사도세자외에는 딱히 후계를 이을 사람이 없던 찰나에 자신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니,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손자였던 정조였고 영조로서는 광인으로 돌변한 사도세자보다는 손자인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게 됬습니다.
하지만 태종때 양녕대군, 충녕대군 때와는 달리 세자와 세손은 부자관계이므로 만약 사도세자를 단순 폐세자하고 세손이 왕위에 오른다면 조선의 특징상 권력은 대원군이 된 사도세자에게 권력이 쏠리게 될 수 밖에 없기에 결국 세자를 죽여야 했고 비록 왕이라도 국본인 세자를 죽이려면 단 한가지 명분, 역모 밖에 없었고 그것을 충족시켜주었던 것이 바로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고발이었습니다.
결국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역모로 죽었지만 영조는 정조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사도세자가 죽은 뒤 곧바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부자간의 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고 그가 왕을 시해하려고는 했지만 그것은 그의 광증에 의한 것이지 실제 역모를 꾸민 것은 아닌 것으로 세손이 왕이 될 명분을 세웠고 결국 정조는 왕위를 이어받게 된겁니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사도세자가 죽어서 정조가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임오화변의 본질은 세손으로의 직계 승계였고 그 과정에서 걸림돌인 세자가 제거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 마디로 영조가 사도 세자를 죽인 것은 당쟁의 희생양 이였습니다.
사도세자가 소론을 처벌하자는 노론 주장을 거부하고 소론을 지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자는 노론이 소론 제거를 위해 과도하게 사건을 부풀렸다고 판단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영조는 노론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전해집니다. 사건 관련자를 조사할 때마다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경종과 소론을 지지하는 발언이 쏟아져 나왔지요. 영조 집권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경종독살설의 또 다른 재현이었다고 하구요. . 영조는 분노했습니다. 노론은 관련자를 모두 잡아들여 죽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대리청정을 맡았던 사도세자는 이를 거부했고, 이를 계기로 노론은 사도세자 제거에 나섰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