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을까요?

3·1 운동이 가진 국제적 파급력과 민족 의식 고취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제 정세(파리 강화 회의 등)의 한계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궁금합니다.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조선에는 당시 일본인 경찰 1만명 근처, 일본군 5만명 근처가 배치되어 이를 비무장 군중으로 뒤집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당시 무기로는 소총,기관총,수류탄,박격포등이 이미 운용되고 있었으니가요. 그리고 일본 본토에는 30만명 근처의 일본군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모여서, 만세 운동으로 독립을 되찾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시대가 조선초나 고려말 정도 되면 칼이나 죽창, 쪽수로 조직적으로 밀어붙이면 독립이 가능할거 같네요.

    일본이 1922년 경에는 7500톤급의 항공모함도 운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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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택된 답변
  • 나쁘게 표현하면

    그냥 전국적인 시위였습니다.

    빼앗긴 나라의 국민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빼앗기기전에 즉 남이 침략 옷하게 힘을 길러야 된다는

    교훈과 내분이 궄가를 망하게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참여한 거대한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즉각적인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는 당시의 엄혹한 국내외 정치적 상황및 일제의 무자비하고 압도적인 군사력 진압때문에

    평화적인 만세 시위만으로는 무력으로 무장한 제국주의 식민 권력을 즉각적으로 몰아내기에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