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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08.22

조선시대 왕의 어진을 그릴 수 있었던 화가는 어떻게 선택되었나요?

조선시대에는 왕실을 위한 화가들이 있었잖아요.

유명한 화가로 장승업, 김홍도, 신윤복 등이 알려져있었는데, 그럼 이 중에서 왕의 어진을 그릴 수 있었던 사람은 어떻게 선택 또는 선발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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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8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무나 어진을 그린 건 아닙니다.

    전국 팔도에서 내로라하는 화공들이 뽑혀오면 따로따로 방에 들어가 까다로운 시험을 치르고 관료들의 품평에 이어 왕의 얼굴색이 잘 표현됐나 마지막엔 왕의 주치의인 약방제조에게까지 심사를 받았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 제작에 앞서 어용 화사( 어진화가)의 선발은 우선 대신들이 당대 화가들 중 초상화를 잘 그리는 자들을 천거하여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되는 자를 선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재(試才)를 거쳐 최후 결정을 보기도 하였는데 어진도사(御眞圖寫) 및 모사(模寫)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 도화서 소속 화원 중 초상화로 이름난 화가들이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어진을 제작하는 화가를 어용화사라고 불렀는데요, 어용화사는 당대 화가들 가운데 초상화로 이름난 화가들의 리스트를 대신들이 쭉 뽑고,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의논해서 선정하거나, 시재(試才)라고 하는 시험을 거쳐 결정했습니다. 예를들면 초본, 즉 스케치나 도안을 그려보게 시켜서 잘 하는 사람을 담당 관료가 선정하고, 왕 앞에 나아가 초본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보통은 도화서 화원들 중에서 초상화를 잘 그리는 사람을 선정했으나, 조선 왕조에서 세 번, 1713년(숙종 39), 1748년(영조 24), 1900년(고종 37)에는 도화서 화원이 아닌 민간 화사를 뽑아 시재에 참여시키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어용화사를 단 한명만 선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용안, 즉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 얼굴 이외의 부위를 그리는 동참화원, 채색을 돕는 화채가 각기 따로 있었으며, 이들 역시 여러명을 뽑았기 때문에 총 6명에서 13명정도가 한 번에 어용화사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조선시대에는 왕의 어진을 그리는 화가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화가들은 '어진화사'라고 불렸습니다. 어진화사는 보통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했습니다. 어진화사가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은 물론이고, 왕실의 예법과 규율을 잘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어진화사는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왕의 초상화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왕의 초상화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려졌습니다. 어진화사는 왕의 초상화를 그릴 때, 왕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위엄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어진화사로는 김명국, 김홍도, 채용신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갖춘 화가들이었습니다. 또한, 왕실의 예법과 규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시대의 왕들의 어진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셨다면 추천 좋아요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서 왕의 어진(어린 왕)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일반적으로 왕의 성조와 성품을 높이 평가하는 품위를 갖춘 인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궁중의 예술적, 사회적 관례와 관계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궁중 예술은 문화 및 예절 교육의 일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왕실은 예술을 통해 왕의 위엄과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예술가를 선별하였습니다. 아울러 왕이나 왕세자의 어진을 그리는 작업은 그들의 미소년 시기의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했기 때문에, 예술가는 정교한 기술과 관찰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화가가 왕의 어진을 그릴 때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르곤 했습니다:

    1. 궁중 내 화가 선발: 궁중 내부에는 예술가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특히 화가로서의 기술과 실력을 인정받은 예술가들이 왕의 어진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2. 모범화 상업화: 어진의 그림은 모범화 상업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화가가 왕세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베낭이라 불리는 그림판에 먼저 그리고, 그 이후에 종이나 비단에 옮겨 그리는 방식이었습니다.

    3. 왕의 실루엣과 특징 재현: 화가는 왕의 얼굴, 머리카락, 의복 등을 정확하게 그려내어 왕의 실루엣과 특징을 재현했습니다.

    4. 풍모 강조: 왕의 어진 그림에서는 왕의 어린 시절의 순수한 미소년 모습과 왕의 미래에 대한 풍모가 강조되었습니다. 왕의 풍모를 강조함으로써 왕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요약하자면, 조선시대에서 왕의 어진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예술적인 기술과 귀족적인 품위를 가진 인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어린 모습과 풍모를 정확하게 재현하여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어진은 왕의 초상화로 어진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궁중 최고화가나 화가들이 모여서 왕의 모습을 그렸는데 털하나까지도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가장 많이 남아있는 어진은 조선시대로 태종 원종 영조2점 순조 문종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어진 제작의 첫 단계는 어진을 그리는

    화가인 어진화사(御眞畵師)를 선발하는 일이었습니다.

    어진화사는 시재(試才)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시재는 '재주를 시험한다'라는 뜻으로,

    화가의 출신보다 실력을 가장

    우선시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해설을 하고 있는 김찬우 입니다.

    어진을 그리는 화가를 어진화사 라고 합니다

    어진제작에 앞서 어용화사의 선발은 우선 대신들이 당대 화가들 중 초상화를 잘 그리는 자들을 천거하여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되는 자를 선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험를 거쳐 최후 결정을 보기도 하였습다.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 도화서 소속 화원 중 초상화로 이름난 화가들이 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1713년(숙종 39)과 1748년(영조 24), 혹은 1900년의 경우처럼 때로는 방외화사를 천거하여 시재에 참여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와 요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