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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남생이120
조용한남생이120

전태일 열사의 일대기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노동 기준법을 위해 노력을 하신 전태일 열사의 일대기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왜 노동 운동에 최선을 다하시게 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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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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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6 · 25 전쟁 후에는 서울에 올라와 살았으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전태일은 학교를 그만두고 동대문 시장에서 잡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고합니다.

    열일곱 살에는 학생복 제조 업체에서 보조원으로 취직하고 재봉을 배운 전태일은 재봉사가 됩니다. 그런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렵고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평화 시장에는 의류를 만드는 제조 공장들이 많았는데, 햇볕조차 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노동자들 특히어린 소녀나 여성 노동자들이 하루 14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다고합니다.

    전태일은 뒤늦게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정한 법(근로 기준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는 동료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 기준법이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평화 시장의 노동 환경과 실태를 조사해 노동청에 근로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도 제출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1970년 11월 13일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평화 시장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로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전태일은 휘발유를 자신의 몸에 붓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했다고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공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달려 나와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전태일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렇다 할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이루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물두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전태일열사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도 노동자들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全泰壹, 1948년 9월 28일[1]~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입니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알려지지 않았다가 문학단체나 여러 단체에서 발굴 뜻을 기르기 위하여 이끌어 내었답니다


    .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분신 항거하였고, 그 날 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어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청계노조와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산업 현장의 부당함을 바로 잡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분의 숭고한 죽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근로복지가 자리잡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일대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에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6 · 25 전쟁 후에는 서울에 올라와 살았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은 더욱 어려워졌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전태일은 학교를 그만두고 동대문 시장에서 잡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평화 시장의 학생복 제조 업체에 보조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가족을 위해 밤낮이 따로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며 재봉을 배운 전태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봉사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차츰 어렵고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평화 시장에는 의류를 만드는 제조 공장들이 많았는데, 햇볕조차 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하루 14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특히 나이 어린 소녀나 여성 노동자들이 더욱 고통받는 환경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전태일은 뒤늦게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정한 법(근로 기준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료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 기준법이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평화 시장의 노동 환경과 실태를 조사해 노동청에 근로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도 제출했다. 하지만 경제 성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박정희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70년 11월 13일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평화 시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로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전태일은 휘발유를 자신의 몸에 붓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태일 -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노동 운동가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전태일은 학위를 받은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이뤘다고 하기 어렵게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음에도 한국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에 전태일이라는 사람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고 알리는 노력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전태일의 일대기를 간략이 알아보겠습니다.

    전태일이 살던 시대는 1950년대로 우리나라가 매우 가난했던 시대에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가난했던 전태일 집은 동냥까지 할 정도로 힘들었기에 어릴때부터 신문팔고 구두닦이를 하며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었으며 늦은나이에 중학교 과정인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편입했을때 매우 행복해하며 공부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인간임을 감사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가난때문에 1년 남짓 다닌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러한 지독한 가난속에서 한번도 타인을 미워하거나 이용하기보다는 가난했기에 어려운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돕기 위해 모든것을 바치는 성정이었습니다.

    결국 가난으로 전태일이 16살쯤 섬유제조공장이 모여있는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되고 점차 기술을 배워 재단사가 됩니다.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을때 함께 일하던 수많은 어린 여자 직원들(여공)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며 어린 여공들을 돕기위해 재단사 자리까지 올라간것으로 알려집니다. 하지만 재단사여도 여공들을 돕는 것에 한계가 있었으며 그런 행동때문에 오히려 공장주인에게 찍히고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한문으로된 근로기준법 책을 알게됩니다. 이책이 한문으로 되어 읽기 어려움에도 한자한자 공부를 하며 책을 정독하게 되고, 한국은 법적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라가 정한 법이 있음에도 현실에서 지키는 공장이 없음에 크게 분노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한 모임을 결성합니다. 이 모임이 많이 알려진 '바보회' 라고 불리는 노동운동 조직입니다. 그동안 바보처럼 모르고 살았고 앞으로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은 이름입니다.

    이후 열심히 활동했으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이 더 많아지고 나중에는 일터인 평화시장에 갈수조차 없게 외면 받게 됩니다. 크게 좌절한 전태일은 이후 다른일을 전전하다 자긴의 신념을 지키고 불태우기 위해 삼각산에 있는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고뇌의 시간을 가진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동여건 개선에 바칠 결심을 하게됩니다.

    1970년 9월에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을 더이상 받아주는 곳이 없었지만 전태일은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닌 '바보회'를 '3동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그곳에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하게 됩니다. 이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방송국과 노동청 등을 다니며 자신들의 권리를 알리고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10월에 이 실상을 알리는 그들의 말이 언론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방송에 놀란 대표들이 개선을 약속했고 전태일은 희망을 꿈꿨지만 이 역시 말뿐이었습니다. 이후 여러번의 집회와 시위도 실패로 돌아가고 좌절되자 전태일은 마침내 유명한 화형식을 하게됩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 큰길에서 노동자들이 집회에 나와 구호를 외칩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구호를 외치는 가운데 전태일이 온몸에 스스로 석유를 뒤집어 쓰고 분신을 한후 거리를 튀쳐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불을 끄러왔지만 이미 심각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절규와 함께 사망하고 맙니다.

    전태일의 이 죽음을 목격한 대중들은 충격에 빠지고 이후 노동자 뿐만이 아닌 학생 종교인 언론인 정치인까지 나서기 시작하면서 근로기준법에 대한 중요성과 그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참한 노동자들의 삶이 관심을 받게 됩니다.

    현재에도 기술과 자본이 최우선되는 시대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가치는 물질적 가치와 비견될수 있는지 많은 담론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곳에서 낮은자의 기본적 권리를 살피던 전태일 정신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주는 인물인거서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197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한민국의 노동자이자 노동권 운동가였습니다. 그는 1948년 1월 28일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16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의 의류 공장에서 일하며 당시 산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혹한 노동조건과 착취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난후 점점 더 노동권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시위를 조직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22세의 나이로 의류산업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항거하여 분신하게됩니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의 전환점이었고 광범위한 시위와 노동개혁 요구를 촉발시켰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지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민주화의 기폭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희생과 활동은 매년 11월 13일에 경축되며, 한국에서는 전태일의 날로 지정됩니다.

    전태일 열사의 유산은 한국의 노동운동에 살아 숨 쉬고 있으며 한국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 정의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의 상징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책, 영화, 다큐멘터리로 영원히 남게 되었으며 전 세계 활동가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은 해방 이후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노동운동가이며,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917

    전태일과 관련한 영화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유명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TvVq_aeC6g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은 대한민국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이다. 1960년대 후반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에 취직하고, 1970년부터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노력했다. 노동환경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자 박정희 정부와 자본기업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다가, 시위 현장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며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분신자살하여 22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흔히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전태일 열사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노동 운동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전태일 열사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현재 수준보다 대우받지 못하거나 대우받는 시기가 늦어졌을 것이다.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에게 처한 열악한 현실에 대해 한국사회가 의식하기 시작하였고 지식인 계층, 대학생들, 당사자 집단인 노동자 계층이 그의 죽음으로 각성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어머니 이소선 열사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노동운동가가 되어 '노동운동의 대모()' 로 불리게 되었다

    출처 -나무 위키

    https://namu.wiki/w/%EC%A0%84%ED%83%9C%EC%9D%BC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봉제공장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동료직원들이 특히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문제의식을 갖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했습니다. 왜 법에 따른 노동시간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지 왜 이렇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하는지 왜 환기도 안되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면 빨갱이로 몰려 쫓겨나고 살아남기 힘든 시절 전태일 열사는 분신을 함으로써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으로 삶을 다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외침과 분신으로 한국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고 노조가 만들어져 많은 노동자들이 법이 정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