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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동그라미417
알록달록동그라미41723.05.17

3.1운동 때 일제가 벌였던 제암리 학살 사건은 왜 일어난것일까요?

3월달에 3.1운동즈음에서 방송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해 방송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이 때 일제가 벌였던 제암리 학살 사건은 왜 일어난것이고 어떠한 악행들을 펼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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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제암리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마을 청년을 비롯한 제암리사람들은 장날을 이용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일본 경찰은 총칼을 휘두르고 매질을 하는 등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으며 주민들은 이후에도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리는 등의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4월 5일 있었던 만세 시위 때 주민들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 사과한다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모이라 했고 마을 사람들이 모이자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를 비롯한 일본군은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으며 불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을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근처에있는 고주리로 가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이 빼앗긴지 5년째 되던 해, 첫번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5년동안을 두고 공전의 큰 혈전을 계속하더니 미국 대통령 윌손이 대전 강화의 기본원칙 14조를 내 걸 때 이해 11월에 독일 측이 이 원측을 좇고 항복하였으므로 전쟁은 이에서 종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윌손의 원측 14조 중에는 이른바 민족 자결 주의의 한 조목이 있었으니 즉 “여러 민족은 각자의 운명을 각자가 결정하라”는 것으로서 온 세계의 약소 민족은 다 윌손의 이 사상에 쏠렸거니와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이를 환영하여 나라 안팎의 많은 지사들이 국민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마침내 세계 약소민족 독립운동 사상 일찌기 없는 기미 운동을 일으킨 것 이었습니다.

    기미(己未, 1919) 3월 3일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예하기 위하여 수일만 군중이 서울로 올라오자 이를 이용하여 3월 1일 병희(孫秉熙)·한용운(韓龍雲)·이승훈(李昇薰)등 전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써 서울과 지방에 일제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며 시위 운동으로 나서니 수일만 군중이 기약치 않고 이에 발을 맞추어 천지는 온통 만세 소리에 파 묻혔으며 이 신성한 자유의 종소리는 몇날이 되지않아 방방 곡곡에 전파하여 전국의 노소 남녀가 한꺼번에 떠들고 일어났으며 국외 각지 동포의 호응과 아울러 우리의 굳센 혼을 세계에 알으켰습니다.

    일본인은 이 비무장한 모범적인 민족 운동에 대하여 폭력으로 탄압하며 총 놓고 칼질하고 뺏고 불놓기하여 수 많은 민중이 이에 희생되었거니와 그 중에도 수원군 제암리에서 일인이 취한 만행은 뒷날 일본 동경 지진 때 죄없는 우리 동포 수만명 학살 사건과 함께 그 잔악무도한 본성을 스스로 천하에 폭로한 것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9년 3월 31일 제암리에서 가까운 발안(發安) 장터에서는 장날을 기해서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하였다. 게다가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독립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1일 밤,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때문에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부녀자와 어린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삼계리(三溪里)로 피신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처럼 3월말을 전후로 만세 시위 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자, 몇 개의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되면서 3 · 1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가 시작되었다.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마을 사람 중 몇 사람이 발안장터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1919년 4월 15일(화요일) 오후,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기독교 교회당에 강제로 모이도록 하였다.

    대량 학살하고 방화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3월 30일(또는 4월 5일) 발안 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계획하였고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은 발안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만세운동은 계속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습니다. 이 시위에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일본인 순사부장이 사망하였고,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도 불에 탔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가둔 후 불을 질렀으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교회에서만 23명이 사망하였고, 인근의 고주리 주민도 6명이 사망했다고합니다.


    출처 - 지식백과 제암리학살사건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삼일운동 여파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벌인 만세시위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안종후를 비롯해 남자 21명, 여자 2명이며 인근 마을 팔탄면 고주리에서 김성렬 등 남자 6명이 학살당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