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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05.26

1934년에 있었던 조선학운동은 어떤 내용인가요?

1934년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 정약용 서거 99주년을 기념하며 조선학 운동을 제창하였다고 하는데

조선학 운동은 정확히 어떤 운동인가요?

조선학 운동으로 이루려고 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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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6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30년대 일제의 식민주의적 조선(한국) 연구에 대항하여 조선인 본위의 조선 연구를 주창하고, 나아가 독자적 조선 인식을 통하여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문화·학술적 차원의 민족운동.

    1925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관(官)의 주도 아래 조선 연구를 집대성하고, 그 성과를 확산하고자 하였다. 1932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조선사》는 정체성론, 타율성론으로 상징되는 식민사관에 기초하여 왜곡된 한국의 역사상을 담아내고 있었다. 또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청구학회(靑丘學會)를 조직하여 식민주의적 조선 연구를 더욱 심화하고, 그 논의를 확산해 나갔는데 이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다. 조선학운동은 이러한 일제의 연구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운동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서양의 근대 사상과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었다.

    하나의 문화·학술 운동으로서 ‘조선학운동’이 주창된 것은 신간회 해소 이후 정치 활동 공간을 상실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합법적 문화 운동을 모색한 결과이기도 하다. 1934년 다산 정약용의 서거 99주년을 맞이하여 《여유당전서》를 간행하고, 다산 기념사업을 추진한 것을 계기로 조선학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인 정인보(鄭寅普)와 조선일보에서 활동하던 안재홍(安在鴻)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언론 기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조선학은 '조선에 고유한 것, 조선 문화의 특색, 조선의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조선 고유의 사상을 마련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자주적으로 연구하여 민족의 지도 원리이자, 사상 혁신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조선학운동을 통하여 한국의 역사, 문화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발전을 이뤄왔음을 강조하는 가운데, 특히 조선 후기의 개혁 사상으로서 실학(實學)에 주목하였다. 실학을 민족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학문이자, 민족에 실익을 가져다주는 학문으로 규정하였다. 당시 일각에서는 감성적 복고주의라는 비판도 제기되었으나, 조선학운동은 단순히 한국의 민속이나 토속적 문화를 현양하기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보편적 가치와 주체적인 근대화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1936년 '손기정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언론 활동이 통제되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일제가 황국 신민화를 위해 민족말살정책을 강력하게 펼치면서 조선학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민족 고유의 사상과 문화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해방 이후까지 면면히 이어져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한국(조선) 연구를 극복하는 토대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학운동 [朝鮮學運動]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을 넘어 중국으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중국으로 진출하여 한창 전쟁을 벌일때 식민지인 조선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하면 안되므로, 이때부터 일본은 조선인들의 사상을 개조하여 일본인으로 재탄생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의도에 맞서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우리 역사, 우리 말 등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조선학운동입니다.

    출처 -- 두산백과 두피디아 조선학운동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5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관의 주도 아래 조선 연구를 집대성하고 그 성과를 확산하고자했고, 1932년 간행되기 시작한 조선사는 정체성론, 타율성론으로 상징되는 식민사관에 기초해 왜곡된 하국의 역사상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또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청구학회를 조직해 식민주의적 조선 연구를 더욱 심화, 그 논의를 확산해 나갔는데 이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조선학운동은 이러한 일제의 연구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운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서양의 근대 사상과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학 운동 > 1930년대 일제의 식민주의적 조선(한국) 연구에 대항하여 조선인 본위의 조선 연구를 주창하고 나아가 독자적 조선 인식을 통하여 민주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문화.학술적 차원의 민족 운동 입니다.

    조선학 운동의 목적은 조선인의 문화적 순화, 심화, 정화를 목적으로 조선학 수립을 위해 문화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1934년부터 전개되었다. 이를 주도한 이들은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이었다. 이때 주장된 조선학은 조선에 고유한 것, 조선 문화의 특색, 조선의 전통 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그 내용 이였습니다.

    이러한 1930년대의 조선학 운동의 궁긍적인 목적은 과거 민족주의 역사학이 지나치게 국수적 낭만적이었음을 반성하고, 우리 민족의 고유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찾으려 하였으며 조선 후기 실학을 주목하여 고대사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를 발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조선 후기 사회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자본주의 맹아론도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학운동은 일제강점기때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우리나라 '조선'에 관한 것을 더욱 알아보자! 라는 취지에서


    시작 된 운동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재홍 등이 있습니다.



    조선 혁명군은 1929년에 결성되어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 입니다.


    대표적 인물로는 양세봉 등이 있으며, 영릉가 전투,흥경성 전투 등을 치렀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학 운동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식민 지배를 사상적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제 관학의 식민 사관 및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개된 운동이었습니다. 1925년 조선사 편수회가 총독 직속의 독립 관청으로 설립되어 관 주도의 식민주의 역사학을 확산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조선사 편수회는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에 입각한 식민 사관으로 한국사를 왜곡한 『조선사』를 1932년부터 간행하기 시작하여 1938년 전 37권으로 완간하였습니다. 또한 청구학회(靑丘學會), 경성 제국 대학 등과 연계하여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왜곡된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조선학 운동은 이러한 일제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 사관 확산에 대한 비판과 극복을 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조선학 운동은 문명개화론(文明開化論), 서화론(西化論) 등으로 상징되는 한국 역사의 문화 자산과 성과를 부정하고 서양 근대 사상과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입하여 이를 추종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실증과 고증을 기반으로 한국 역사와 문화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탐구하고, 민족을 단위로 하는 독자적인 한국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의 지향과 역사를 실학을 통해 입증하려 했습니다.

    일제는 1936년 8월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조선학 운동의 유력한 후원처였던 한국의 언론 기관을 억압하여 무력화시켰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 전후로는 허울뿐인 ‘내선일체’을 주장하면서 보다 강화된 사상 통제와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일제는 일체의 조선적인 사회⋅문화⋅학술 활동을 억압했으며, 전 방위적인 친일 전향의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렇게 일제가 식민지 억압과 통제를 강화하였기 때문에 조선학 운동은 사상적 이론적 모색과 연구를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곧 수그러들게 됩니다. 그럼에도 조선학 운동은 일제의 식민 사관과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의 부활과 실학 연구의 초석을 다졌고, 독자적인 한국 민족주의 사상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