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을 즐겼는데 당시그는 많은 사치재를 어디서 구해왔나요?
연산군은 엄청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수많은 사치재들을 어디서 구해와서 그것을 즐기고 사용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고급스러운 물건들을 수입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예품 제작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지원하여 고급스러운 물건들을 생산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창덕궁 후원 역시 사치와 쾌락의 공간으로 만들어 갔는데 연산군은 후원에 높이와 넓이가 수십 길이 되는 서총대(瑞葱臺)를 세우고, 그 아래 큰 못을 팠는데 해가 넘도록 공사를 마치지 못할 정도였고 또 창덕궁 후원에서 경복궁·경회루까지 임시 건물 3천여 간을 이어 짓고, 망원정 아래의 조수(潮水)를 끌어들여 창의(彰義)의 수각(水閣) 아래까지 파서 통하게 하려고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물길의 깊이와 너비·고저를 측량하게 하고, 거기에 동원될 역부(役夫) 50여만 명을 동원하였다고 할 정도로 국고를 남용 했습니다. 당시 국왕은 국고를 마음 대로 쓸수 있을 권력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러한 학정으로 결국 왕좌에서 쫃겨 나게 된 것 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자신이 머무르는 궁궐을 비롯하여 서울 일대의 주요 명승지를 사치와 쾌락의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인물입니다.
그 가운데, 궁궐도 연회 장소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에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산군이 자주 잔치를 베푼 모습들이 나타나 있다. “경회루 연못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희를 즐기기 위해 흥청 수백명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이런 잔치의 흥을 돋구기 위해 연산군의 전국에 임사홍, 임숭재 부자처럼 '채홍사'를 파견했다고 합니다. 이때 뽑힌 기녀들을 운평(運平), 가흥청(假興淸), 흥청(興淸)이라고 하였습니다.(예, 장녹수)
그리고 궁궐은 물론 궁궐과 가까이 연회를 열 수 있도록 정자를 만들고 꾸몄다고 하는데, 창덕궁 후원을 사치와 쾌락의 공간으로 만들었으며 텅춘대, 서총대 등의 정자를 건설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도감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부를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응준방을 두어 팔도의 매와 진귀한 새, 짐승을 포획하여 궁궐, 정원의 볼거리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