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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당시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이 있을까요?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묘였을까쇼 외국인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당시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이 있을까요? 어찌하여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 도굴이라는 짓을 한건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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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의 상인이던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한 사건이다. 오페르트는 1851년부터 상하이에서 상업 활동을 하고 있었다. 1866년과 1868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통상 수교를 요구하며 이양선을 타고 조선 해안가에 접근했다. 특히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조선이 천주교를 탄압한다며 구만포에 상륙해 덕산 군청을 습격하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으나 묘가 생각보다 단단해 실패하고 돌아가 버렸다.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서양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오페르트 일행은 1868년 5월 차이나호(China號) · 그레타호(Greta號) 등 1천 톤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주1에서 머스킷소총과 도굴용 도구를 구입한 다음, 그 달 10일 충청남도 덕산군 구만포주2에 상륙하여 아라사인이라 사칭하면서 남연군 묘로 행군하였다.

    도굴단은 덕산군청을 습격해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로부터 발굴도구를 약탈하여 가동(伽洞)의 남연군 묘로 직행, 밤에 도굴에 착수하였으나 묘광주3이 견고하여 실패하고, 날이 밝아오자 철수하였다.

    오페르트는 돌아오는 길에 인천 영종도에 들러서 프랑스제독 알리망(Allemagne, 亞里莽)의 명의로 “귀국의 안위는 존하(尊駕)의 처단에 달렸으니 대관을 파견 교섭하자.”라는 내용의 글을 흥선대원군에게 전해달라고 하였으나, 영종첨사 신효철(申孝哲)은 도굴행위의 만행을 규탄하고 양이(洋夷)주4와는 성기(聲氣)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글을 되돌려주었다.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하여 고발당하였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에 대해 더욱 부정적이 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6. 11. 15., 이은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의 상인이던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둘한 사건으로 이 사건을 통해 대원군은 서양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

    남연군묘를 도굴했던 오페르트는

    상인이었던걸로 아는데 인류학자이기도했나요?

    형제들 중 인류학자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오페르트가 학자였는지는 모르겠네요.

    네 맞습니다.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은 1868년 고종 5년 상인이자 학자인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1] 에른스트 오페르트 도굴 사건(Ernst Oppert 盜掘事件)으로도 불린다.

    이 일로 인해 병인박해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1]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68년 4월 조선이 천주교를 탄압한다며 구만포에 상륙해 덕산 군청을 습격하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으나 묘가 생각보다 단단해 실패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은 서양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한 것이 쇄국을 촉발한 또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도굴에 가담한 천주교인들은 3년 후에 체포되어 모두 능지형을 당했다. 원래 대원군은 서방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권력을 잡은 초기엔 개방에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가 연달아 터지면서 조선사회에서 서양에 대한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대원군 입장에서도 서양과 수교를 맺는 건 조선의 백성과 왕족을 능멸한 문화권 사람들과 손을 잡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정치는 명분이 매우 중요한데 결국 이 사건은 조선의 정치인들이 개방을 주장할 명분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출처: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