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이 시파와 벽파로 갈라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존에는 사도세자를 모함했던 세력들을 벽파, 사도세자를 동정했던 세력들은 시파로 갈라졌다고 하는데,
실제 기록에 의하면, 벽파의 인물들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도 없고, 정조도 벽파인물을 등용한적이 있다고 하는데,
붕당이 시파와 벽파로 갈라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파는 정조의 탕평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정국을 주도하여 나갔는데, 이에 반발하는
벽파가 이들을 시류에 편승하는 무리라고
비판하면서 ‘시파(時派)’ 혹은 ‘시배(時輩)’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또 그에 비해 자신들은 궁벽하게 의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스스로
‘벽파(僻派)’라고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파·벽파의 분리에 관한 문헌상의 언급으로는 다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분파의 기미가 정조 4년(1780)부터 있다가 12년(1788)의 정민시(鄭民始)의 상소를 통해 처음으로 시·벽의 호칭이 나타났다는 설(정조실록 권25, 정조 12년 4월 을묘일조의 정민시의 상소에 대한 사관의 논평).
둘째 영조 만년에 척리 사이에 남당·북당의 갈림이 있었는데, 정조대 특히 그 19년 이후로 남당에 가까웠던 자들이 벽파, 북당에 가까웠던 자들이 시파로 분립했다는 설(순조실록 권9, 순조 6년 6월 신축일조의 사평)
셋째 기원은 남당·북당에 있으나, 정조 8년부터 시파·벽파의 호칭이 쓰이기 시작했다는 설(순조실록 권11, 순조 8년 10월 경인일조의 이심도 상소) 등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시파·벽파 분립의 표면화는 정조의 탕평정책이 더욱 성숙되어 가는 시기인, 즉 12∼19년 사이인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