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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1.12

광해군은 폭군이었어요? 성군이었어요?

안녕하세요. 오늘날에도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극과극으로 나뉘던데 광해군은 무자비한 폭군이었나요? 좋은 정책을 펼친 성군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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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도도한듀공33
    도도한듀공3323.01.12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유년 시절부터 영특하고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때에 왕세자로서 민심을 챙기고 외교적 능력까지 충분했던 인물이었지만, 광해군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중전의 소생이 아니라는 점과 아버지 선조가 광해군을 신뢰하지 않았자, 뒤늦게 중전을 얻은 선조가 아들을 낳으면서, 광해군의 세자 입지는 더 흔들리게 됩니다.

    이렇게 장자 명분을 받은 선조의 늦둥이 아들 영창대군이 왕위 계승에 중요한 편수가되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은 소수파로 전략되어 버립니다. 선조는 3살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수없자, 어쩔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집권 초기의 광해군은 여러면에서 치적을 남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군의 이미지가 퇴색되어 갔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선조의 적장자라고 할수 잇는 영창대군의 존재가 큰 위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창 대군을 역모 사건에 연루시켜 유배 후 살해하게 됩니다. 또한 영창 대군의 생모 인목대비를 궁궐에서 내보내 별도의 별궁에 유폐시켰습니다.

    이러한 폐륜은 반정에 있어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때 이후 광해군은 포용의 정치를 버리고, 반대파들을 숙청하면서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인조 반정 이후 서인 세력에 의해 기록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좋지 않게 평가된 게 있지만, '실리'를 추구한 중립외교 등의 측면에서는 폭군이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폐모살제(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 )에 대해서는 성리학적 국가관을 가진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용납될 수가 없었던 부분이므로 성군이라고 보기도 좀 애매한 위치의 군주였다 이렇게 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