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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양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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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시대에 위구르제국이 있었는데 이 위구르제국의 역사가 100년도 안되는 극도로 짧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나라 시대때 위구르족이 위구르 제국이 있었는데요.

당시엔 당나라도 위협할정도였고 당나라의 반란까지 도움을 줄 정도로 매우 강성한 제국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국가가 100년도 안되는 극도로 짧은 역사인 이유와 이후에 또다른 위구르제국이 건국되지 못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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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구르 제국은 당나라와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초원 지대의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으나, 건국 초기에는 제국을 칭할 만한 기반과 세력, 권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도전하는 세력들을 격파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후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위구르 제국은 당나라와의 관계 변화와 함께 초원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던 다른 세력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멸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구르 제국의 멸망 원인으로는 위구르인들의 급격한 문화적, 사상적 변화의 부작용으로 인한 정체성 상실이 지적되며, 스텝 생활권을 버리고 정착 생활권으로 이주해 감으로써 정복과 약탈이 주 생활이었던 진취적이고 능동적이던 유목민족성 국가 경영이 이반되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39년 창신 가한이 내부 권력 다툼 끝에 사망하고 역병이 퍼지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 , 840년 위구르 제국의 셍귄 퀼릭 바가의 구원 요청을 빌미로 100,000명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키르기스족에게 수도 카라 발가순이 파괴당하며 멸망했습니다.

    위구르 제국이 멸망했을 때 키르기스족이 유목제국을 세워 이들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데 실패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가 막북의 초원지대는 권력의 공백지대로 남게 되었고 이 공백 상태를 틈타 초원지대에 자리를 잡아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유목민족 세력이 몽골 초원의 끝 흥안령 산맥 넘어 동쪽에서 발흥한 거란의 요 나라 입니다.

    13세기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흥기하자 유능한 상인세력으로 변해있던 위구르족은 자진투항해 몽골 제국을 이끄는 브레인 역할을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구르 제국은 839년 창신 가한이 내부 권력 다툼 끝에 시해당하고, 역병이 퍼지면서 혼란에 빠졌다. 840년 위구르 제국의 셍귄 퀼뤽 바가의 구원 요청을 빌미로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키르기스족에게 수도 카라 발가순이 파괴당하며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700년대 중반 위구르족은 바스밀 카를룩 부족과 연합해서 몽골 초원의 패자였던 돌궐 제2제국을 멸망시키고 바스밀과 카를룩도 물리쳤습니다. 오르두 발릭에 수도를 세우고 당나라로부터도 인정받아 위구르 제국을 성립시켰습니다. 제국의 기반도 세력도 권위도 없었기 때문에 사방에서 적들의 공격이 이어졌고 도전하는 적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이런 위구르에게 역학관계의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이 안사의 난입니다. 건국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안사의 난 초창기부터 위구르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756년에 기마병 3000명을 757년에 4000명을 더 파병하여 낙양과 장안을 수복하는데 역할을 다했고 안사의 난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댓가로 당나라로부터 매년 20000필을 포함한 물자를 받게 되면서 세력을 더욱 충실히 키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제국이 된 것입니다. 781년 마니교를 국교로 정하고 마니교의 육식금지에 따라 초원에 밭을 갈고 채소를 기르게 됩니다. 이후 강해진 위구르는 당나라를 협박하여 더 많은 물자를 강탈하게 되었고 이것이 당나라와의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당나라는 모든 물자를 차단시켜버립니다. 물자부족을 겪던 위구르는 주변국들에게 강탈을 했지만 당나라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고 주변국들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820-830년 소례가한시대 세력은 가장 강했으나 그 뒤를 이은 창신 가한이 839년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사망하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역병까지 번지면서 가축들이 몰살당하자 역량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런 국면 속에서 위구르는 키르키스족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위구르족에게 당해왔던 키르키스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해서 10만대군으로 공격을 감행합니다. 결국 위구르는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위구르의 군소집단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사라지게 되었고 일부가 튀르크화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