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일제 시절 미두취인소라는게 있다고 하던데 어떤곳인가요?
구한말 일제 시절 미두취인소라는게 있다고 하던데 어떤곳인가요?
미두취인소는 일제가 쌀을 수탈하려고 만든곳이지만 나중에는 조선에서 가장 큰 도박장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요
미두취인소는 1896년 인천에 개설된 최초의 선물 거래소입니다. "미두"는 쌀과 대두, "취인소"는 거래소를 말합니다.
이곳에서 선물 거래가 이루어지는데, 거래자들은 물품을 주고받지 않고 차액으로 정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일본의 자본과 관리 하에 운영되었으며, 조선의 곡물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투기적 성격이 강했으며, 많은 조선인들이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1명 평가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
미두취인소는 1896년 5월 5일 인천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쌀 선물거래소로, 주로 쌀과 콩을 거래하던 시장입니다. '미두(*료)'는 쌀과 콩을 의미하며, '취인소( 리 )'는 거래소를 뜻합니다. 이곳에서는 현물 없이 보증금만으로 거래가 이루어졌으며, 시세 변동에 따라 차익을 노리는 투기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일본인 미곡상 14명이 자본금 3만 원으로 설립하였으며, 인천 주재 일본영사관의 허가만으로 인천 개항장내 일본인 거주지에 세워졌습니다. 거래는 3개월 기한부 선물거래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중매점을 통해 거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중매점은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하였고, 조선인으로는 일부만 참여
하였습니다.
미두취인소에서의 거래는 오늘날의 증권거래와 유사하였으나, 대상이 주식이 아닌 미곡이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미두취인소는 투기와 가격 조작 등의 문제로 인해 많은 폐해를 낳았습니다. 일부 성공한 미두꾼도 있었지만, 많은 조선인 지주와 중소 기업인들이 재산을 잃거나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폐단으로 인해 1898년과 1919년 두 차례에 걸쳐 해산되었으며, 임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는 사건도 발생하였습니다.
1931년 조선거래소령이 공포되면서 인천미두취인소는 경성주식현물거래소와 통합되었고, 이후 경성거래소 기미부로 전락하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통제 경제에 밀려 휴업 상태에 있다가 광복과 함께 문을 닫게 됩니다.
1명 평가안녕하세요. 권기헌 전문가입니다.
미두취인소는 1890년대에 일본이 조선의 미곡을 가져가기 위해 설치된 곳으로 인천 군산 대구 등지에 설치 되었습니다. 조선의 쌀은 일본 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이를 일본으로 가져가서 팔면 큰 수익이 나기 때문에 서로가 먼저 일본으로 판매하려 했죠.
이때 셀 수 없는 쌀가마니가 들어와서 이를 선물 거래를 통해서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선물거래가 현재의 주식 투자처럼 선물거래가 이루어졌고 일본인들에 비해 이런 거래가 익숙치 않았고, 일본인은 일본 본토에서 쌀가격을 미리 전보를 통해서 알고 있는 일본인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조선인들은 많은 현금을 잃었다고 하네요.
1명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