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주 시인은 어쩌다 죽음을 맞이했나요?
안녕하세요. 윤동주 시인의ㅜ시가 참 좋습니다.
잚은 생을 마감한 윤동쥬 시인의 죽음이 궁금합니다.
어떻게ㅜ운동주시인은 죽음을 맞이하였는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시대로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조국은 외세에 강점되고 친일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특히 윤동주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절은 1938~1941년으로 창씨개명과 위안부 설립, 전쟁을 위한 강제 징용, 국어폐지, 역사, 국사교육 강제금지가 있을때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송몽규와 검거되어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인 윤동주는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인데 동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동촌은 척박한 땅이었으나 1899년 김악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명이 이주하고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동간도 최대의 한인촌을 이루었습니다.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광명중학교와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였고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의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00여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습니다. 사인이 일제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제의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합니다. 사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제국 경찰의 요시찰인이었던 송몽규가 교토에서 사촌이자 유학생인 윤동주, 제 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 등과 어울리며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하면서 특히 징병제 실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태평양전쟁 강화협상이 진행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서 세계의 관심을 끌고 조선 독립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위 3인 외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이 더해진 민족주의 그룹을 만들어진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를 파악하고 특고경 측은 송몽규, 윤동주를 포함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을 체포, 약 1년 7개월 동안 수감 생활에서 건강이 악화된 윤동주는 광복을 불과 반년 앞 둔 1945년 2월 16일 뇌일혈로 인해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요절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 시절 사상범으로 체포 되어 2년 형을 받습니다. 막상 일제 재판정에서 선고된 형량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사상범죄의 선고 형량이 예상 외로 가볍지만 그러나 사상 범죄라 해도 일제 공안당국이 사건을 만들어 신문을 거쳐 투옥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거나 사망자가 나오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결국 윤동주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감옥에서 옥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