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가 존재하는데 남흉노는 정확히 어떤 존재이고 고고학으로 어떻게 나오나요?
흉노는 몽골 초원에서 오랫동안 한족 왕조를 괴롭힌 유목민족입니다. 그런데 남흉노는 별개의 새로운 민족이라기 보다는 서기 48년 흉노 제국이 내분으로 갈라지면서 후한에 복속한 흉노 세력을 말합니다.남흉노의 지배층은 흉노 왕실과 귀족이었지만 구성원과 전체가 하나의 순수한 혈통 집단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흉노 제국 자체가 여러 부족과 지역 집단을 묶은 정치적 연맹이었습니다. 남흉노 역시 여러 부족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남흉노가 후한에 복속하는 대신 변경 방어와 군사 지원을 담당하였습니다. 이후 삼국의 통제를 받으며 여러 지역에 나뉘어 배치되었고, 점차 한화되었습니다. 또한 4세기 초 남흉노 출신 유연이 전조를 세우면서 5호 16국 시대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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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민족과 문명은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얼마나 지속되었을까요?
히타이트는 현재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성장한 고대 문명입니다. 기원전 17세기경부터 기원전 12세기까지 약 500년간 존속한 국가입니다. 히타이트는 전차를 효과적으로 운용해 이집트 등과 경쟁했는데, 카데시 전투는 두 국가의 대표적인 전쟁입니다. 또한 철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용한 문명으로 주변 문명에 철기를 전달한 국가입니다.하지만 히타이트는 성경과 이집트 기록에 이름만 남아 있어 오랫동안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유적과 비문이 발견되면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887년 이집트 아마르나에서 히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의 외교문서가 발견되면서 존재가 확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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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라는 국가는 왜 이상하게 유적이 거의 안나오는건가요?
부여는 본래 현재 중국 송화강의 지류를 중심으로 성장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부여 유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부여가 존재하지 않았기 보다는 위치와 보존, 연구 여건이 어렵기 때문입니다.우선적으로 부여가 중국 지린성 일대 등 만주에 있어 한국 역사 연구가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큽니다. 그리고 부여의 왕성이 지린시 일대의 동단산 남성자고성 등이 거론되지만 단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전쟁과 도시 개발, 홍수, 퇴적 등으로 유적이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고구려 유적과 비슷하여 부여 유적으로 판별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는 부여의 존재를 보여주는 토기, 철기, 성곽 등의 자료가 일부 확인되지만 왕성, 도성 등이 명확하기 않아 접근 조차 쉽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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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우리나라 기업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기업은 무엇인가요?
현존하는 기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업은 두산입니다. 두산은 1896년 박승직이 서울 종로에 세운 박승직 상점에서 출발합니다. 박승직상점은 무명, 면포 같은 옷감과 포목을 주로 팔았습니다. 이후 일본, 영국산 면직물과 모직물을 주로 취급햇습니다. 그리고 사업이 커지자 곡물, 소금, 방적사, 솥, 저울, 도량형기 등 생활용품으로 판매 범위를 넓혔습니다. 1915년 여성용 화장품인 '박가분'도 만들어 팔았다고 합니다. 이후 상호를 두산상회 바꾸고 사업을 확장하여 오늘날 두산그룹이 된 것입니다. 1897년 동화약품, 신한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도 오래된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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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장은 장보고의 부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장보고를 암살했나요?
염장은 본래 장보고의 부하였습니다. 염장은 838년 장보고가 김우징을 도와 왕위 쟁탈전에 나설때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해였습니다. 그러나 장보고가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면서 중앙 귀족·왕실과 갈등을 빚자, 염장은 중앙정부 편에 섰습니다. 즉 조정은 장보고의 강력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옛 부하였던 염장을 이용한 것입니다. 염장은 장보고에게 다시 투항하는 것처럼 속여 접근했고, 장보고가 마련한 연회에서 그를 암살했습니다.염장이 장보고를 배신한 것은 개인적인 원한보다는 신라 왕실과 중앙 귀족의 포섭때문이라 해석됩니다. 그 대가로 관직을 받은 인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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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이고,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나요?
보어전쟁은 영국과 네덜란드계 이주민인 보어인 사이에 벌어진 두차례 전쟁입니다. 보어인들은 네덜란드계 정착민의 후손으로 영국의 지배를 피해 내륙으로 이동해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네 자유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케이프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확대하려 하여 갈등하였습니다. 특히 트란스발에서 금광, 오라네 지역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제1차 전쟁에서는 보어인이 승리했지만, 제2차 전쟁(1899~1902)에서는 영국이 승리했습니다. 그 결과 트란스발과 오라녜 자유국은 영국에 병합되었고, 훗날 남아프리카 연방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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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저술한 <불씨잡변>의 주요 내용은 무엇은 무엇인가요?
정도전은 고려말 신진사대부로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고려를 개혁하려한 인물입니다. 특히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 자체를 비판하였습니다. 여기서 '불씨'는 불교와 부처의 낮추는 낮추어 부른 표현입니다. 주요 내용은 불교의 윤회설, 인과설, 지옥설, 화복설을 비판했으며, 불교가 인간의 본성과 마음을 잘 못 이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출가와 독신 생활을 부모, 가족, 국가를 중시하는 유교적 인륜에 어긋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승려가 노동 활동을 하지 않고, 개인의 내세 구원보다 현실 사회의 질서와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는 유교가 더 실천적인 사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즉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와 승려를 비판하고, 이를 대신하여 성리학적 국가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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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대사가 강조한 관음신앙란 무엇이고, 왜 중요시여겼나요?
의상대사가 강조는 '관음신앙'은 관세음보살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면 현실의 고난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살피고, 재난, 질병, 가난 등을 구해주는 보살입니다. 따라서 의상대사는 당나라에서 화엄사상을 배우고 신라에 귀국해 관음신앙을 퍼뜨려 불교의 대중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본래 삼국시대 불교는 왕실과 귀족 중심이고, 백성들과는 동떨어진 종교였습니다. 따라서 백성들도 불교에 귀의시키기 위해서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관음신앙을 활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효의 아미타 신앙과 의상의 관음신앙의 확산으로 통일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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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칠사’라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나요?
'수령칠사'는 조선시대 수령들이 고을을 다스리기 이해 <경국대전>에 규정된 것입니다. 모두 7가지 업무이며, 이 성적에 따라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구체적으로 농상성(농업과 양잠을 발전시키는 것), 호구증(백성을 안정시켜 인구를 늘리는 것), 학교흥(학교와 교육 증진), 군정수(군사 행정), 부역균(세금과 부역을 공평하게 부과), 사송간(소송을 공정하게), 간활식(아전과 토호의 부정 횡포 방지)입니다.수령칠사는 지방 통치의 기본 원칙으로 부임전 임금에게 이 내용을 확인받기도 했으며, 관찰사를 이를 바탕으로 수령을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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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주요 지역명에 담긴 역사적 유래와 명칭의 기원
우리나라의 지방 행정 단위인 '도'는 고려시대 5도에서 조선시대 태종 당시 8도제로 확립되었습니다. 경기도는 수도를 뜻하는 '경;과 주변 지역을 뜻하는 '기'가 합쳐진 말이며,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를 합쳐 부른 명칭입니다. 그리고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를 합쳐 만든 명칭입니다. 그리고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 함경도는 함흥과 경성을 합친 명칭입니다. 이처름 도명은 경기도를 제외하고 그 지역의 중요한 고을을 합쳐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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