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길이는 대화의 의미를 바꿀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답변자 생각으로는 침묵의 길이도 대화의 의미를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의사소통 중에 침묵은 단순히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동의, 반대로 거절, 그리고 숙고, 긴장, 배려 등을 표현하는 방식이라 생각합니다.예를 들어 짧은 침묵은 생각을 정리하여 전달하기 위한 시간이라 봅니다. 반면 침묵이 길어지면 망설이거나 불편함 심경을 전달하는 의사입니다.그리고 맥락에 따라 침묵은 긴 침묵은 편안함, 사색을 전달하는 방식이고, 토론에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즉, 대화 중에서 침묵은 오히려 몇마디 말보다 정확하기 상대방에게 심경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전달되는 의사 소통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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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나요?
고구려의 수도는 졸본, 그리고 국내성, 마지막에는 평양성으로 하였습니다. 평양 천도는 427년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겼습니다.평양 천도는 단순히 수도 이전이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국내성은 방어에는 유리하나 땅이 좁고, 북쪽에 치우쳐 있어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면 평양은 대동강 유역으로 평야가 발달하여 경제 기반이 강했으며, 교통에도 유리했습니다. 특히 남진정책에 유리한 지역이었습니다.또한 국내성에 오랫동안 뿌리 내린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평양 천도는 고구려가 만주 중심의 방어형 국가에서 한반도까지 아우르려는 공격적, 확장형 국가의 변모이며, 남진 정책을 위해서입니다. 또한 국내성의 재지 귀족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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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하영이 신규드라마 홍보차 예능에 나와서 자기 가족 내력을 말하면서 소환된 증조부 안상호가 일제 시대에 친일 행적 논란으로 온나라가 시끄러운데 구체적 친일 내역이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입장을 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 대정친목회 평의원, 겨엉부협의회원, 겅성 종로 금융조합 조합장 등 친일 행보를 보였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에서는 안상호의 친일 행적에 대해 맞다고 하였으나 친일 인명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것은 선정 기준의 미달로 보류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한 상태입니다. 즉,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것이 곧 친일이 아니라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 통치 구조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정황이 확인되 인물이라 공식 입장을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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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이 있었는데도 왜 고전소설은 필사본으로 많이 유통됐나요?
조선시대 인쇄술이 발달하였지만 고전 소설을 인쇄는 비용 부담이 컸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필사본이 더 널리 퍼졌습니다. 조선시대에 인쇄본은 주로 법전, 경전, 관찬사 등의 중요한 책에 집중된 것입니다.조선시대 목판이나 활자본은 제작 비용이 많이 들고, 소설은 정본보다 재미와 유통이 중요해서 손으로 베껴 돌리는 게 더 쉬웠습니다. 특히 양반가나 독서층이 마음에 드는 작품을 개작하거나 덧붙이기에는 인쇄본보다 필사본이 유리했습니다. 즉, 조선시대 인쇄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고전 소설 유통에는 필사본이 비용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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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는 왜 김구 선생을 싫어하는 걸까요?
김구 선생은 본래 우익적 성향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이후에도 우익 성향의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극우 성향의 일부 사람은 김구 선생에 대해 싫어하는 것은 우선 해방 직후 통일 정부 수립 운동 행보에 대해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특히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등 우익 세력들과는 다르게 민족의 분단을 막고자 했던 남북 협상 등에 행보에 대해 오히려 좌익,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식의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행보에 대해 폄하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것은 김구 선생은 좌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임정에서도 해방 이후에도 우익 민족주의 인사였습니다. 다만 분단을 막고, 통일을 우선시하는 태도에 일관적입니다. 오히려 이승만, 친일파 등이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김구 선생의 행보를 폄하려는 태도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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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유럽 과연 반등의 기미는 보이나요?
유럽이 완전히 모락하였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과거 제국주의 시대 세계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1,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은 미국 중심의 패권이 강화되었으며, 소련 붕괴 이후 중국이 대세로 대두되면서 유럽은 더욱 기세가 약화된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유럽은 낮은 성장률의 회복 국면에 있습니다. 유로존 성장률 전망치는 1.1~1.2%대 수준으로 제시되고, 독일의 재정 확대가 반등의 해김 변수로 거론됩니다. 하지만 재정약화, 제조업 부진, 에너지 불확실성 같은 약점도 계속 남아 있습니다. 다만 유럽연합의 제도적 힘, 높은 기술 수준, 금융,외교 영향력은 여전히 강합니다. 따라서 유럽은 당분간 예전의 패권을 그대로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회복하며 새로운 형태의 영향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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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는 왜 안토니우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나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2차 삼두정치를 이끈 로마의 장군이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선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것이 강점이 있었습니다. 젊었지만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카이사르의 유산을 잇는 사람이라는 상징은 로마내에서 지지층의 결집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그리파 같은 뛰어난 장군을 능숙하게 활용했습니다. 본인이 전장을 완전히 장악한 장수는 아니었지만 믿을만한 인재를 써서 실제 전쟁을 맡겼습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 끌린 인물이라는 인식이 컸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를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여론과 정치 선전에 유리했습니다. 반면 안토니우스의 지배 영역은 로마와 동떨어져 있었고 여론을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즉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잇점과 인재 활용, 그리고 로마 여론의 절대적 지지를 통해 안토니우스-클렝파트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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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독립운동가에 대해 궁금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대명사로 불리는 가문이 이회영 6형제 가문입니다. 이회영 가문은 임진왜란 당시 명재상 이항복의 후손으로 조선시대 내내 명문가입니다. 아버지 이유승의 아들은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으로 이회영은 네째입니다.이회영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닥치자 신민회 회원으로 국권 수호 운동과 해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주도했습니다. 그와 형제는 국권피탈 이후 막대한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 기지 삼원보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한인자치단체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이후 아나키즘과 항일구국연맹 등에도 참여하여 무장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항일구국연맹 활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2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습니다.이회영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인물로 국가의 위기에 재산을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이는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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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라는 나라는 대통령이 3명이라고 하는데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보스니이 헤르체고비나는 대통령이 3명이나 됩니다. 이는 한마디로 민족 갈등을 막기 위한 권력 분점 제도때문입니다. 보스니아는 1990년대 내전이 매우 참혹했기 때문에 전쟁 후 만든 테어텐 평화협정에서 '한 집단이 국가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자'라고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가 각각 1명씩 국가원수 원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각 민족이 뽑은 대표를 봅아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한 것입니다. 3명은 동시에 있지만 한 사람이 계속 대통령이 아니라 8개월씩 돌아가며 의장 역할을 수행합니다. 즉 외형상으로는 3명이지만 실제로는 공동국가원수 체제입니다. 즉,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3인 대통제를 시행하는 것은 과거 1990년대 내전으로 인한 학살을 막기 위해 특정 민족이 권력을 독점을 막기 위한 안정 장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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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의 나이는 몇인가요?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100살 정도가 최고이지만 그래도 가장 오래 생존한 사람은 프랑스의 잔 루이스 칼망입니다. 그는 122세 164일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1875년 2월 21일 태어나서 1997년 8월 4일 사망했습니다. 오래 산 이유는 여러 설명이 있지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유전적 요인과 비교적 안정된 생활 환경입니다. 또 본인은 스스로 '미소가 장수 비결'이라고 말한 일화도 있어, 평소 긍정적이고 건강한 습관으로 장수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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