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열사가 지키려 했다. 그 형은 어떻게 됐나요?
박종철 군은 1987년 1월 민주화 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던 선배이자 민주화 운동의 동료였던 박종운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경찰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박종운씨는 이후 살아남아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나 2000년대에는 보수 진영으로 전향하여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선되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정치적 영역에서 한국 정치의 흐름을 바꾸고 싶다는 취지로 한나라 당에 가입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민주정의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정치적 활동을 하려한 행보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박종철 군 추모 행사에 참석하였지만 떳떳하지 못한 행보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잉카문명이라는건 어떤건지 알려주세요?
잉카 문명은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지를 중심으로 발전한 제국입니다. 12~13세기 쿠스코 일대에서 시작되었으며, 15세기 초 파차쿠티 황제 때 정복 활동이 크게 이루어져 약 100년만에 안데스 지역의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1532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침입하면서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잉카 황제는 사파 잉카라 불렸다고 합니다. 황제를 중심으로 관료와 지방 관리들이 전국을 통치하였습니다. 잉카는 정복한 민족의 언어와 풍습을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행정 언어로 케추아어를 널리 보급하고 태양신 숭배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문자는 없었으나 키푸라는 매듭으로 기록을 남겼습니다. 잉카 문명은 거대한 도로망과 해안과 안데스 산맥을 따라 수천km의 길을 만들어 운용하였습니다. 대표적 건축물로는 마추픽추도 있습니다. 산악 지형에 거대한 돌을 정교하게 쌓았으며, 돌 사이에 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정교했습니다. 잉카인들은 주로 옥수수, 감자, 퀴노아를 재배하여 먹고 살았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성경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가 어떤 의미고, 뭘까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은 내 욕심과 성공을 가장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다스림을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이 내 삶과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시도록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며, '그의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운혜에 따라 사랑, 정직, 용서,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말합니다. 전도도 중용한 열매이지만 내 삶이 좋아 보여야 하나님을 전할 수 있다는 부담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벽해져서 주님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서도 주님을 먼저 따르는 삶 자체가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뉴스에 많이 나오고 있는 중동의 후티 반군은 누구인가요?
후티는 예멘 북부를 근거로 하는 정치, 군사 조직을 말합니다. 후티 운동은 1990녀대 북부에서 지아드파 전통을 지키고 정부의 부패와 외세 개입에 반대하자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04년 예멘 정부와 무력 충돌을 시작하여 2014년 수도 사나를 점령하면서 예멘 내전의 중심 세력으로 커졌습니다.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예멘 정부를 지원하며 개입하였고, 후티는 이란의 지원을 받아 능력을 키웠습니다. 2023년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이 시작된 뒤 후티는 팔레스타인을 돕기 위해 이슬라엘과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홍해의 선박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홍해와 아덴만을 잇는 좁은 해상 통로인데, 이 지역을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후티와 이란은 모두 미국·이스라엘 및 사우디아라비아에 적대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란은 후테 반군을 지원하며 저항의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관여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전쟁이 중단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중단되더라도 후티·헤즈볼라·이라크 민병대 같은 친이란 세력이 움직이면 대리전 형태의 긴장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스페인 국가에는 가사가 없다는데 사실인가요?
스페인 국가는 <마르차 레알>, 즉 왕실 행진곡으로 현재 공식 가사가 없습니다. 이 곡은 1761년 군대 행진곡으로 만들어졌으며, 1770년 국왕 카를로스 3세때 왕실 공식 행진곡이 된 것입니다. 과거 사람들이 가사를 붙이려 했지만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프랑코 독재 시기에는 가사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민주화 이후 독재 정권으로 여겨 폐기되었습니다. 가사가 없는 이유는 카탈루나, 바스크, 갈리시아 등 지역 정체성을 고려하여 정치적 입장이 다양하여 가사를 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고려시대에 진주민란은 1차 봉기 이후 정방의의 난으로 이어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1200년 진주에서 일어난 공사노비의 반란은 노역을 부과하던 향리들의 수탈에서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노비들은 향리의 집을 불태웠지만 일단 이 봉기는 진압되었습니다. 그런데 향리 정방의가 활과 화살을 들고 관아에 찾아가자 관리 전수룡은 새롭게 정방의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했습니다. 정방의는 증거가 없어 풀려났지만 목사 이순중이 다시 그를 붙잡아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정방의 동생이 형을 구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즉 정방의 형제는 사람들을 모아 보복성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전수룡의 근거 부족한 의심과 정방의의 재체포가 민란을 정방의의 난으로 확대시켰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조선전기에 편찬된 '고려사'는 객관적으로 기록된 역사서라 할 수 있나요?
<고려사>는 조선 건국 초기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술한 측면이 강합니다. 조선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왕조였기 때문에 고려말 혼란과 부패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려사>에는 무신정권기와 우왕과 창왕 시기의 비판하고 조선 건국이 고려의 잘못을 바롭잡은 것이라는 흐름으로 기술했습니다.특히 우왕과 창왕을 정식 왕의 기록인 ‘본기’가 아니라 ‘세가’에 포함한 점,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점에는 조선의 성리학적·정치적 관점이 반영되었습니다.따라서 <고려사>는 현대적 의미의 완전한 객관적 역사서로 볼 수 없습니다. 즉, 조선 왕조 성립의 정통성, 성리학적 가치관, 고려말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중점적으로 기술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거대했던 몽골은 왜 현재의 모습이 되었을까요?
몽골 제국이 오늘날 처럼 축소된 것은 정복으로 넓은 영토를 지배할 만큼 통치 제도와 후계 체제를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칭기즈칸 사후 후계자들은 제국으로 공동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특히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케 형제는 내전을 벌이기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몽골 지배층은 현지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고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원나라는 중국식 황제국가가 되었고, 서아시아의 몽골 지배층은 이슬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지역을 하나의 몽골 국가로 묶는 힘이 약해졌습니다. 특히 몽골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족간 내전, 지나치게 넓은 영토에 대한 느슨한 중앙 통제, 정복 이후 행정 부담, 피지배 민족의 반란, 14세기 흑사병 등으로 몽골 약화를 촉진했습니다. 이후 몽골은 청나라 지배, 소련의 영향을 받다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놓여 내륙국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겹쳐 성장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신라의 골품제는 왜 그렇게 오래 유지됐나요?
골품제는 신라 지배층 사이의 신분제도로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부족으로 귀족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특히 왕족인 진골 귀족들은 골품제를 통해 고위 관직과 정치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물론 6두품은 학문과 행정 능력이 있어도 승진의 한계로 불만이었습니다.골품제는 신라의 중앙 집권 강화와 귀족들의 특권 질서 유지를 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오래동안 신분제도로 존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재 등용을 막고 사회의 불만을 키웠습니다. 결국 9세기 후반 골품제의 한계로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여 후삼국 시대를 열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왜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관심을 옮겼나요?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만 몰입되었던 시각을 인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즉, 신의 질서 안에서 인간의 이성·능력·창의성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한 사상입니다. 그 배경은 이탈리아 도시의 상업 발달하면서 시민계층의 성장하였습니다. 시민들은 신학뿐만 현실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원했으며, 이것을 고대 그리스·로마 문헌에서 찾은 것입니다. 따라서 유력자들이 예술과 학문의 후원하고, 인쇄술의 발달이 르네상스의 발달을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이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 종교 중심의 사고에 인간의 가치와 현실 생활에 대한 관심이 더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