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발명했으며, 한국에서 언제부터 냉장고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나요?
냉장고는 특정한 한 사람이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냉동 원리는 1748년 영국의 글래스고대의 윌리엄 컬런이 에테르 기화를 이용한 냉각 실험을 했고, 1805년 미국의 올리버 에번스가 증기 압축식 냉장고를 설계했습니다. 그리고 1834년 영국 출신의 제이콥 퍼킨스가 인공 얼음을 만들어 압축기를 개발해 특허를 냈습니다. 최초의 기계식 냉장고는 1862년 영국의 제임스 해리슨이 에테르 냉매와 압축기를 갖춘 냉장고를 만들어 국제박람회에 선보이며 냉장고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그리고 가장용 냉장고는 1913년 미국 시카고에서 프레드 울프 주니어 등이 초기 가정용 냉장고를 만들어 1918년 미국의 켈비네이터사가 판매하기 시작하고, 이후 제너럴일렉트릭 등이 개량하여 대중ㅎ화였습니다. 우리나라는 1965년 금성사에서 출시하여 국산 냉장고 시대를 열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 경제 성장과 생활 수준 향상으로 서서히 늘었고,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에 50% 수준까지 올라갔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조선시대 관직중 죄의정과 우의정은 누가더 실세였나요?
조선시대 의정부를 구성하는 정승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있습니다. 의정부는 국정 심의 결정하고, 백관을 통설하는 역할을 하는 합의제 통치 장치입니다. 영의정은 의정부의 수장 역할을 하며, 국정 전반을 총괄합니다. 그리고 좌의정은 영의정을 보좌하면서 이조 등의 주요 부서를 겸대헤 실제 정책 집행과 인사에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우의정은 삼정승 가운데 서열이 가장 낮으나 병조 등 무관 인사 등을 겸대하여 국정 균형을 잡습니다.영의정이 의정부의 수반(총리)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의정부 운영은 좌의정과 우의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상석에 있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가장 최초라고 여겨지는 문명은 어디인가요?
전통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3500년경에 형성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입니다. 오늘날의 이라크와 시리아 일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인들은 관개농업을 바탕으로 청동기 사용, 쐐기 문자 사용, 우르크와 같은 대규규모 도시와 국가 체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이집트 문명, 인더스와 황하 문명이 발전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는 누가 만들었나요? 제작 과정과 역사적 배경은 어떻게 되는지 자세하게 설명 해주실수 있는 분 계실까요? 감사해요.
태극기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미국측이 국기 게양을 요구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고종에 문의하고 고종의 지시에 따라서 역관 이응준이 군함에서 국기를 제작하여 사용했습니다. 이응준은 1882년 5월 14일~22일 사이 미국 군함 스와타라 호 안에서 태극 문양과 4괘를 그린 기를 처음 제작해 조약식에 게양했습니다. 그리고 1882년 9월 박영효가 임오군란 수습을 위해 일본행 선상에서 기준 태극기의 4괘 배치를 다듬어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귀국 이후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고 1883년 3월 6일 고종이 국기로 공포하면서 국기로 확정되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이순신 장군의 집안은 고려시대에도 유명한 집안이었나요?
이순신 장군의 집안인 덕수 이씨는 고려시대에도 무관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문반 가문으로 바뀌었다가 이순신 대에 다시 무반 명문으로 자리잡았습니다.덕수 이씨 시조 이돈수는 고려 때 신호위 중랑장(정5품)을 지냈습니다. 2대 이양준은 보승장군(정4품)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고려말 관직이 높지 않은 한미한 무반으로 연연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초기 7대조 이변이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 영중추부사(정1품)에 오르며 문반 가문으로 변신했습니다. 이후 가세가 기울어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관직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중국이 윷놀이, 추석, 아리랑 타령, 판소리까지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등록을 했다는데 저게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나요?
중국은 동북 3성의 조선족 관련 전통 문화를 중국의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왔습니다. 2006년 농악무와 널뛰기, 그네뛰기, 2008년 장고춤과 학춤, 2011년 아리랑, 판소리, 2014년 윷놀이 등입니다. 중국은 이들을 조선족의 전통으로 표기하며 자국 내 소수 민족 문화로 보호 전승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유네스코는 한나라의 등재가 다른 나라의 등재를 막지 않으며, 중복 공동 등재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중국 등록은 중국 내 인식과 전승 체계를 강화에는 영향이 있으나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소유권이나 문화 유산 지위를 부인하는 효과는 없습니다. 하짐나 중국이 자국 내 등록을 바탕으로 유네스코 등재를 먼저 추진하거나 해외 홍보, 콘텐츠 산업에서 선점 효과를 노릴 경우 문화적 기원 인식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어 한국의 체계적 기록, 홍보 공동 등재 전략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주 우크라 대사 소환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건가요?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소환한 이유은 한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의 북한군 포로 2명의 한국 송환 사실을 비공개 합의했지만 어기고 일방 공개한 것에 대한 공식 사과 해명을 요구했으나 우크라이나 측의 대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우크라이나 대사대리 초치에 이어 대사 소환으로 수위를 높인 것입니다. 상대국에 보내는 가장 강력한 항의 메시지입니다. 즉, 양국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만 대사 소환은 공관을 폐쇄하거나 외교 관계를 끊는 것은 아닙니다. 대사대리 등 다른 외교관들이 남아 업무를 계속할 수 있어 관계는 유지하되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입니다. 이와 같은 조치는 상대국의 태도 변화를 압박하면서도 대화 창구는 열어둔다는 이중 메시지입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프랑스 제2제정을 이끈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부른 전쟁은 무엇인가요?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부른 전쟁은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보불전쟁)입니다. 나폴레옹 3세는 1866년 프로이센이 빠르게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자 중재만 하고 개입하지 않아 프로이센의 부상을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의 함정에 빠져 결국 1870년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면서 보불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군은 연패했고, 스당 요새에서 프로이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 3세는 항복을 결정했고, 프랑스군과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에 파리에서 봉기가 일어나 제2제정이 폐지되고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혀 있다 석방되어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1873년 사망했습니다. 즉, 나폴레옹 3세는 보불 전쟁의 패배로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갑신정변과 청과 일본 군대의 무력 충돌
갑시정변 발발 당시 서울에는 청군이 일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청군은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위안스카이 등이 이끄는 3천명의 병력이 주둔했으며, 청불 전쟁 발발로 일부가 철수했어도 상당수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1882년 8월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 공사관 수비를 위해 1개 대대(15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따라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고종의 밀지를 받은 형태로 일본 공사관 호위병 150명이 궁궐 호위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약 1500여명은 국왕의 요청도 없이 창덕궁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일본군은 인원이 적고 본국으로부터 정변 개입 자제 지시를 받은 데다 결정적 순간에 철병하면서 개화당은 급속히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갑신정변은 청군과 일본군이 서울에서 직접 교전한 사건입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제3자 심자군 전쟁에서 사자왕 리처드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벌인 대결은 무엇인가요?
사자왕 리처드 1세와 살리딘이 예루살렘을 두고 치열하게 맞선 것은 3차 십자군 전쟁입니다. 리처드가 이끄는 십자군이 해안가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남하하자 살리딘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아르수프 근처에서 공격합니다. 결과적으로 리처드가 이끄는 십자군이 승리했으나 예루살렘 탈환까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리처드는 1년여간 살라딘과 전투와 협상을 반복했으나 결국 예루살렘 탈환은 실패했습니다. 1192년 9월 양측은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남되 무장하지 않은 기독교 순례자들의 자유로운 방문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3차 십자군은 성지 탈환에는 실패했으나 기독교 순례 권리를 확보하고 아크레 등 일부 해안 도시의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