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오스트리아는 왜 두개의 나라로 지내는가요?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게르만계 언어와 문화권지만 역사적으로 별개의 국가입니다. 가장 큰 요인은 1806년 신성로마 제국 해체 이후 독일 통일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두 나라는 본래 신성로마제국의 안에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신성로마 해체되었으며, 이후 19세기 민족주의가 활성되면서 통일 운동이 할성화되었습니다. 하지만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결렬 이후 프로이센 주도로 통일이 추진되었으며,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통일을 추진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1866년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문제를 둘러싸고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르면서 각자 결별의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 제국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헝거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 여러 민족을 거느린 다민족 국가로 탄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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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는 왜 현재 이란이 되었을까요?
'페르시아'는 원래 그리스인들이 '파르스' 지역의 이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외래 명칭입니다. 즉, 유럽인들이 이란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예를 들어 '인도'도 외부 세계가 오래전부터 부르는 국가명이지만 자신들은 내부적으로 바라트(Bharat)라 불러왔습니다. 우리가 도이칠랜드를 '독일'이라 부르는 것이라 비슷합니다. 반면 이란은 오래전부터 현지에서 쓰이던 이름으로 흔히 '아리아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1935년 레자 샤 팔라비가 외국에 자국을 페르시아가 아니라 '이란'이라 불러달라고 요청하였지만 국제 공식 명칭이 굳어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페르시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주로 고대 역사, 문화, 문학, 예술을 가리킬 때 많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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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나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중국을 거의 알지 못했던 유럽인들에게 구체적으로, 그리고 매우 풍부하게 보여줘 유럽인들에게 큰 반향을 주었습니다.실제로 동방은 유럽인들에게 신비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폴로가 쿠빌라이 칸의 궁정, 대도같은 거대한 도시, 종이 화폐, 석탄, 비단과 진주, 향신료 등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여 놀라움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믿기 어려웠지만 더 넓은 세계를 상상하게 한 것입니다. 이후 <동방견문록>은 유럽에 '동방은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리는 인식을 심어줘 호기심과 더불어 신항로 개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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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이 중국 바로 앞의 금문도를 차지하고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요?
중화민국과 국민당이 국공내전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만의 실효지배하는 금문도는 대만 본섬과 떨어져 중국 푸젠성 샤먼과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국민당이 1949년 이후 금문도에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키고 요새화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도 금문도는 대만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금문도는 중국 본토에 매우 가깝지만 바로 가까움 때문에 대규모 상륙 점령 작전이 오히려 부담이 컸습니다. 그리고 본토 반격의 거점의 끝까지 사수했기 때문에 대만의 실효 지배가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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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민족 자결 원칙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레닌의 민족 자결 원칙은 각 민족이 자기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제국의 강제 지배를 받지 않고, 자치나 독립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 안에서도 그 민족이 원하면 분리, 독립까지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이는 민족 억압을 제국주의 한 형태로 보았고, 이를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억압없는 민족의 불만을 억지로 눌러두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제국주의 타도와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정치적 전략이기도 했으며, 식민지 약소 민족의 해방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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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도 20세기초 우리 동포들이 이주했다는데 사실인가요?
한인 동포들이 미주로 이주한 것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였습니다. 이후 일부 동포들이 샌프란시코를 거쳐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주하여 애니켄 농장에서 매우 힘든 노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차 대전 이후 쿠바에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였지만 노동자가 부족하자 이 곳으로 노동 재이주한 것입니다. 즉 쿠바 한인들의 이민은 처음 부터 한반도에서 바로 간 것이 아니라 1905년 멕시코로 간 한인들 중 일부가 쿠바로 재이주한 것입니다. 이들은 쿠바 마나티 항구에 도착한 뒤 카르데나스, 아바나 등지에 정착했고, 한글학교와 국민회 지방회도 세우며 공동체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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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의 유교구신론이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요?
박은식의 유교구신론의 핵심은 조선의 성리학적 유교 질서에 대한 반성과 근대 사회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은식은 유교가 임금 중심에 치우쳐 민중 사회로 퍼지는 힘이 약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불교, 기독교처럼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전파하는 선교성이 부족하며,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라 공리공론적 학문이라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따라서 유교를 민중 중심이고 실천적 사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즉, 즉 공자의 대동사상과 맹자의 중민 사상을 살려 민지와 민권을 키워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유교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민중중심의 근대적 실천 사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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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왕이 위만에 쫒겨 한왕이 되었다는데 근거가 무엇인가요?
기원전 194년 무렵 위만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위만 조선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쫒겨난 준왕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근거는 <삼국지>에 '준이 위만에게 쫒겨 바다를 거쳐 한의 지역으로 가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했다'라고 취지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후한서에서도 비슷한 기록으로 전합니다. 이 두기록이 말하는 핵심은 준왕이 위만에게 패했다는 점과 그 뒤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왕이 된 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니면 후대 사서가 당시 남쪽 지역의 정보를 끌어와 덧붙인 것인지는 논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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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의 역사와 사용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라틴어는 고대 로마의 언어입니다. 로마 제국과 가톨릭 교회, 그리고 유럽의 학문 전통을 통해 서유럽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공용어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법, 의학, 과학, 외교, 브랜드 이름 등에 라틴어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확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라틴어가 행정, 도시, 도시 생활의 언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세 유럽에서 교회와 학문을 통해 계속 유지된 것입니다. 그리고 라틴어는 나중에 유럽 언어 속에 변형되어 남아 있는데,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같은 로망스어 계열은 라틴어를 바탕으로 갈려져 받아들여 진 것입니다. 그리고 서양 근대 문물의 수용과 더불어 한국어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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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운룡문호병은 조선시대 후기와 관련이 있는지
청화백자 운룡문호병은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15세기 중엽에서부터 만들어졌으나 본격적으로 만든 것은 조선 후기입니다. 경기도 광주 왕실 관요에서 만든 세조~성종 시기의 청화운룡문 병은 조선 전기 작품으로 설명됩니다. 반면 청화백자 운룡문호로 불리는 다른 유물들은 광주 분원리에서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운룡문은 용무늬라서 왕실 전용 또는 왕실 의례용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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