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화백회의는 왜 만장일치제를 고수했나요?
화백회의는 신라 6부족 연맹체제에서 출발한 회의 기구입니다. 의사 결정은 만장일치로 정하는 이는 연맹체 전통, 6부 연합에서 출발한 공동체적 합의 문화가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입니다. 국론 통일의 필요, 국력이 약해 모든 세력을 모아야 전쟁을 치룰 수 있었다는 현실을 반영한 의사 결정 체제입니다. 또한 왕권 견제와 귀족 단결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이를 통해 국왕과 귀족의 권력을 조절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중대사 있을 때만 열렸고, 진골 귀족인 대등이 참여하며 상대등이 의장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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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용어 할렐루야 어원과 의미알려주세요.
할레루야는 히브리어를 음차한 말로 '야를 찬양하라'란 뜻입니다. 그리고 아멘이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응답, 확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할레루는 '찬양하다'라는 동사 할랄의 2인칭 남성 복수 명령형입니다. 즉, '너희를 찬양하라!'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야'는 하나님의 이름의 축약형으로 '야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할레루야는 두 히브리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즉, 할렐루야는 "야훼를 찬양하라"는 히브리어 명령형 초청이며, 그 안에는 '빛나게 하다'라는 어근에서 온 기쁨의 외침이 담겨 있습니다. 아멘이 "그렇습니다"라는 응답이라면, 할렐루야는 "찬양하라"는 부름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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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제국은 어떤 동맹국 같은 것이 없었나요?
아시리아 제국도 동맹국은 있었습니다. 다만 대등한 우방이라기 보다는 압도적 힘을 바탕으로 한 속국, 조약국에 해당합니다. 아시리아는 이웃과 다양한 조약을 맺었습니다. 다만 이 조약의 대부분은 '아슈르의 멍에'라 불릴정도로 속국, 종속국 체계로 공물과 군사 지원 의무를 지우는 불평등한 관계였습니다. 예를들어 아시리아가 프삼티크를 이집트 왕으로 세운 이유로 동맹을 맺었으며, 616년 바빌로니아군을 유프라테스까지 추격하며 아시리아를 지원했습니다. 리디아도 아시리아 말기에 맺은 동맹으로 함께 바빌로니아, 메디아 연합에 대항했습니다. 즉, 아시리아에게 동맹국은 있었지만 가혹한 지배로 만든 불평등한 속국 체제였고, 정작 결정적 순간에 남은 것은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먼 나라 이집트와 리디아뿐이었습니다. 위기 때 진짜 도움을 줄 가까운 우방을 만들지 못한 것이 멸망을 앞당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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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비변사의 영향력이 점점 커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비변사는 중종 때 삼포왜변을 계기로 임시로 설치된 기구입니다. 즉 국방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임시 대책 기구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명종 때 을묘왜변이 있은 후에는 상설기구로 되었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로 발전했습니다.비변사의 중요성이 커진 이유는 비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구, 여진의 침입이 이어지고, 임진왜란 때는 전쟁 수행을 위해 최고 기관으로 활용된 것입니다. 즉, 비변사는 "국방 위기 대응"이라는 명분으로 태어났지만, 위기가 계속되고 그 자리에 실권자들이 모이면서 국방 기구가 국정 최고 기구로 변모한 사례입니다. 임시·비상 기구가 상설화될 때 권한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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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어떻게 9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나요?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상앙의 변법을 통해 개혁입니다. 즉 귀족이든 평민이든 법을 똑같이 적용하는 법가적 통치를 하였습니다. 봉건 귀족 세력 없애고 권력을 왕에게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군공에 대한 포상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그외에도 정전제를 폐지하고 토지 사유를 인정해 농업 생산을 폭증시켰습니다. 또한 지리적으로 함곡관 서쪽 관중 평원을 차지하고 있으며, 황하와 효산이라는 천험으로 보호받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 무기는 "원교근공"의 외교 전략입니다. 즉, 먼나라와는 친교하고 가까운나라를 먼저 공격하는 전략입니다. 그리고 6국의 분열도 진나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합종으로 맞섰지만 지속적인 연합에 실패했고, 진나라는 이틈을 파고 들었습니다. 즉, 진시황의 9년 통일은 상앙 변법으로 130년간 축적한 국력, 함곡관이라는 지리적 방어막, 원교근공으로 6국을 분리, 6국의 연합 실패가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9년은 '기적'이 아니라 오래 준비한 자의 마지막 일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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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는 왜 그리스 신화에 대응하는 신이 없는 로마 고유의 신인가요?
야누스는 그리스 신과 대응하는 신이 없는 것은 그리스신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로마의 토착 신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기원전 3~2세기 그리스 문화를 대거 받아들였습니다. 자기 신들을 그리스 신과 짝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피테르를 제우스와 짝짓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야누스는 그리스 신 가운데 그의 영역과 일치하는 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야누스는 "문", "통로"를 담당한 신으로 앞뒤가 없고,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신에는 그의 역할을 한 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인들도 이 사실을 알고 오히려 자신들만의 신이 있다는 것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또한 야누스는 모든 기도에서 유피테르보다 먼저 호명되었으며, 따라서 1월의 유래, 전쟁시 열리는 야누스 신전도 그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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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부 방법이 궁금합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교재의 단원명, 주제명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단원 및 주제와 연관된 내용을 본문에서 찾아 봅니다. 특히 원인과 과정, 결과 및 영향을 연결하여 이해하면 좋습니다. 또한 자신만의 스토리 연표를 제작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가로 선을 긋고, 핵심 사건을 선의 중간중간 표시해가면서 학습니다. 그리고 학습 할 때마다 추가하여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키워드 빈칸 채우기, 인물과 정책 등 순서 배치, 질문하기 등을 통해 복습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사건에 따라 해석이 갈리는 것은 사료를 남긴 사람의 입장의 차이때문입니다. 따라서 교차 체크 및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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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규장각은 왜 정조 시대에 특히 중요한 정치기구로 성장했나요?
규장각은 정조가 설치한 도서관이며, 학술 연구 기관입니다. 본래 세조때 발의되고, 숙종 때 종정시에 부설된 소규모 도서관으로 선왕의 어제와 어서를 봉인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국가 권력의 핵심으로 재구성했던 것입니다.우선 규장각은 학문정치에 맞는 청요직을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외척과 단절한 국왕 측근 인재를 양성하려 했습니다. 특히 정조는 규장각을 근거로 초계 문신제를 관할하여 당색을 초월한 친위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즉 정조가 외척·노론 벽파를 우회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규장각을 직접 설계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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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아시아 게임 언제 개최해고 누가 만들어나?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비롯되었으며, 4년에 한번씩 열렸습니다. 근대 올림픽은 프랑스의 쿠베르탱이 부활시켰는데, 1894년 파리 소르본에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창설되고, 1896년 아테네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쿠베르탱의 목적은 스포츠를 통한 국제 이해와 평화, 청소년의 체육 교육이었습니다. 영국 기숙학교의 스포츠 교육과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가 만든 표어가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 입니다.아시안게임은 1947년 인도 독립 직전 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관계 회의에서 아이디어가 나왔으며, 1949년 뉴델리에서 아시아 경기연맹이 창설되고, 1951년 뉴델리에서 제 1회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습니다. 두 경기 모두 4년에 한번씩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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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에 폭탄은 떨어진곳은 다시떨어지지않았다고 하던데 진짜인가요?
질문한 내용은 통계적 착각입니다. 2차 대전 중 런던에 떨어진 V1, V2 폭탄을 두고 하는 말인 것같습니다. R.D. 클라크(1946)는 남부 런던 576개 격자의 낙하 분포가 푸아송 분포(완전 무작위)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즉 폭탄은 완전히 무작위로 떨어졌고, "더 안전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이는 도박사의 오류이자 군집 착각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무작위 속에서도 억지로 패턴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당시 런던 시민들은 "번개처럼 폭탄도 같은 곳에 두 번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하짐나 도쿄 대공습 때는 이 말을 믿지 않았습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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