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과 국제유가, 그리고 영국의 석유 독점권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이란 카자르 왕조 시절 1091년 영국 사업가 윌리엄 다시가 이란의 석유 채굴권을 사실상 독점했습니다. 1908년 대유전이 발견되면서 영국의 이해관계가 급격히 커졌으며, 이후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로 이어져 영국의 핵심 에너지 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석유 독점권은 이란인에게는 불공정한 인식이 환산되었습니다. 결국 1951년 이란이 석유 국유화를 단행하였습니다. 이에 대응해 영국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란 국민들에게는 반외세 감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이와 같은 감정은 서방과 오래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도 중동은 석유 수송의 핵심 지역이라 전쟁, 긴장이 생기면 국제 유가에 영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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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왜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나요?
삼국 중 백제가 4세기 근초고왕 시기에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는 우선 3세기 고이왕 때 이미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고이왕은 관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습니다. 또한 지리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중국 남조와 연결되기 유리했으며, 왜에도 해상 교류를 펼치기 유리했습니다. 게다가 평야 지역에 위치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했습니다.정치적으로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 마련, 지리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대외 교류와 경제적 부유함을 바탕으로 전성기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근초고왕은 황해도 일대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평양까지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며, 남쪽으로 마한 세력을 거의 통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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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계통인 돌궐과 그리고 위구르족은 몽골계에서 어떻게 분리되고 자리를 잡게되나요?
돌궐은 6세기 중반 몽골 고원에서 강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당나라 세력에 눌러 동서로 분열되어 약화되었습니다. 그틈에 위구르를 포함한 투르크 부족연맹이 성장한 것입니다. 이후 돌궐을 대신하여 몽골 고원에서 패권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돌궐은 제국이 무너진 뒤 동서로 흩어졌고, 서방으로 이동한 부류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여러 국가를 세웠습니다.즉, 돌궐은 몽골 고원에서 패권이 약화된 이후에 서쪽으로 세력을 이동시켜 여러 투르크 후계 집단으로 갈라졌고, 그 자리를 위그르가 차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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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은 왜 각각 다른 시기에 불교를 받아들였나요?
삼국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수용했습니다. 따라서 각 국가의 정치 상황에 따라 달랐습니다. 고구려는 4세기 소수림왕 때 전진과 교류가 활발하면서 순도를 통해 불교를 수용햇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4세기말 침류왕 때 불교를 수용했습니다. 백제는 남조와의 교류 과정을 통해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수용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신라는 본래 5세기 눌지왕 시기에 묵호자에 의해 들어왔으나 국가적 수용은 6세기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와 더불어 입니다. 이는 다른 나라보다 신라는 전통 신앙과 귀족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수용 과정에서 반발로 늦어졌습니다.삼국은 고대 국가로 발전 과정에서 국가 통합의 사상으로서 불교를 수용하였습니다. 특히 왕즉불 사상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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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누가 언제 처음 시작하였나요?
생일을 축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고대 문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생일을 축하하는 행위는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왕이나 귀족같은 특정한 사람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이 점차 일반 대중에게도 퍼져 자신의 생일을 챙기는 문화가 된 것입니다. 생일을 몇세까지 한 다는 것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나이를 먹는 것 자체가 장수의 경사로 중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물이 생일을 챙기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인간들이 동물의 생일을 챙기기는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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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은 중동과 유럽대륙으로의 진출계획이 없었는데 호라즘과의 어떤 관계로 진출한 계기가 되었나요?
서요가 멸망한 이후 몽골과 호라즘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이 때 호라즘의 술탄 알라웃딘 무하마드이 몽골과의 관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즉, 통상단 사건이 서간이 발생한 것입니다. 몽골이 보낸 상인과 사절단이 호라즘 측에서 살해하고 재산까지 빼앗아 칭기즈칸의 분노를 샀습니다.이 전쟁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몽골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와 이후 유럽 방향으로도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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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시아에서의 유연족이 정확히 어떤 민족이며 몽골계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유연족은 4~6세기 중반까지 북방 초원에서 활약한 유목 세력입니다. 유연은 한가지 혈통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여러 유목 부족이 결합한 초원 유목 연맹의 성격이 강합니다. 언어와 기원에서 대해서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일부에서는 튀르크-몽골 계통, 또다른 설명으로는 선비계와 연관된다고 합니다.유연은 흉노 전통의 뒤를 잇는 초원 정치 세력이지만 완전한 혈통적으로 직계 후손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즉, 흉노-유연-돌궐로 이어지는 관계를 완전한 혈통 계보처럼 이해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그리고 몽골계와 관련성도 가능성이 있지만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즉, 유연족은 몽골고원 기반의 유목 연맹국, 흉노와는 초원 제국의 계승 관계 속에서 연결되며, 몽골계와도 관련 가능성이 있지만 확정된 단일 민족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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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전성기를 맞았나요?
고구려가 가장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는 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입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군사적 팽창을 본격화한 시기입니다. 그는 백제를 압박하고, 신라를 도와 구원하고 가야 지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또한 거란, 후연 등 주변 세력을 압박하거나 복속시키며 만주지역까지 영역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고 백제 한성을 점령하는 남진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고구려는 군사적 방어뿐 아니라 경제 기반과 국제 외교의 폭까지 넓혔습니다. 그래서 남진정책은 고구려 전성기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국가 전략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 교류하며 동북아시아의 패권국으로 군림했습니다.두 국왕 시기 전성기라는 말은 단지 전쟁에서 많이 이겼다는 것만이 아니라 넓어진 영토를 지탱할 구조까지 갖추었던 것입니다. 또한 동아시아 패권과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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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항우처럼 무의화신으로 불리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항우는 무력과 패기를 가진 인물의 상징입니다. 서양에서도 무력과 패기의 대명사로 대표적인 인물을 고른다면 신화적인 인물이지만 헤라클레스가 있습니다. 그는 초인적인 힘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는 파괴와 정복의 상징으로 자주 떠오릅니다. 그는 동로마를 압박하며 유럽 전역에 공포를 남겼습니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 웰리엄 1세는 1066년 영국을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세운 인물입니다. 한나라를 무력으로 뒤집고 지배 체제를 바꾼 인물로 서양의 정복왕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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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왜 대한민국처럼 기술력이나 경제가 크게 발전하지 못했나요? 궁금합니다.
아르헨티나는 20세초 선진국급 부국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1인당 국민소득이 당시 캐나다, 호주보다도 부유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오랜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우선 경제의 원천이 농축산물 수출과 해외 자본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따라서 제조업과 기술 산업을 꾸준히 키우지 못했습니다. 자원은 풍부하지만 제도, 정책 실패로 산업 다각화에 실패하였습니다.또한 정치 불안, 재정적자, 과도한 국유화, 반복되는 인플레이션과 외채 문재가 겹치면서 경제자 자주 흔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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